책상위에 있던 달력을 넘겼다. 취재와 마감이 반복되는 <전대신문>에도 새해는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새 머릿속은 휴식이라는 단어로 가득 채워져 갔다. 

빠른 일상에서 벗어난 느림이 자연스러운 곳. 문득 청산도가 떠올랐다. 지난달 21일 1박2일로 다녀온 청산도는 비울수록 채움을 주는 섬이었다. ‘삶의 쉼표’를 찾고 싶다면 새해를 여행으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바쁜 삶에 지친 그대, 나와 같이 걸을까요?

▲ 청산도로 향하는 도선인 기자.

푸르른 보물섬 그리고 한 걸음
완도여객터미널에서 1시간 배를 타고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청산도. 전라도 땅 끝자락에 외로이 자리 잡고 있는 청산도와의 만남은 쉽지 않았다. 눈앞에서 배를 놓친 것이다. 여행은 예정보다 3시간 늦춰졌지만 마음은 조급하지 않았다. 느리게 시작된 여행, 오후 3시에 청산도를 만날 수 있었다.

완도에서 서남해 쪽으로 꼬박 한 시간이 걸려 청산도에 닿았다. 배에서 내려 발을 내딛는 순간 산 넘어 청량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도청항 주변의 아주머니들은 저마다 전복을 바닷물에 손질 중이었고, 할아버지는 벼가 실린 경운기를 몰고 유유히 앞을 지나갔다. 조용한 어촌마을의 풍경 그대로였다.

발길이 닿는 대로 도청항에서 제일 가까운 언덕을 올랐다. 길게 뻗어 있는 돌담길 사이로 그제야 맑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느른한 돌담길과 탁 트인 해안을 간직한 당리마을. 계절을 잊은 듯 푸른 봄동이 솜털처럼 자라고 있었다. 거센 바닷바람에도 죽지 않는 봄동과 맨손으로 돌담을 쌓고 황토길 양옆으로 일궈낸 다랭이 논은 섬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것이다.

▲ SBS 드라마 '피노키오' 촬영지

섬사람들의 애환이 느껴지기 때문인지, 햇빛에 부서지는 파도를 간직한 아름다운 풍경 때문인지. 이곳 당리 마을은 소리꾼의 한을 보여준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였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 ‘봄의 왈츠’를 시작으로 최근 ‘피노키오’의 촬영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어느새 나는 저절로 서편제의 주인공이 되어 진도아리랑을 흥얼거렸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돌담길을 따라 걷다 우연히 만난 아주머니는 말했다. “청산도는 옛날 방식 그대로 하는 것이 많아요”라고. 소를 이용하는 농사부터 관을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짚으로 엮어 2-3년 후 뼈를 골라 땅에 묻는 전통 장례방식인 ‘초분’까지. 시간이 멈춘 듯 청산도 사람들은 옛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 신흥리 해변에서 바라본 일출.

익숙함이 주는 아름다움
신흥리 해변에서의 저녁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근근이 바다에는 달빛만 비췄다. 다음날 아침 7시, 일출을 보기위해 숙소를 나섰다. 일부러 일출명소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청산도의 일출은 어디에서 보아도 장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가 구름에 가려 쉽게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동쪽 해안절벽 아래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주위엔 산과 바위, 바다뿐이었다. 하지만 계속 걸은 보람이 있었다. 어느새 붉은 빛이 보이더니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좋은 일만 가득하길 빌며 둘째 날 여행을 시작했다.

▲ 파시문화거리 골목.

청산도 주민이 추천한 ‘파시(생선 시장) 문화거리’를 찾았다. 여객터미널 바로 뒤편 골목에 자리한 ‘파시 문화거리’는 1970년대 후반까지 고등어와 삼치 파시로 이름을 떨쳤던 청산도의 추억을 담고 있다. 벽에는 청산도의 옛 사진들이 걸려있었고 금방이라도 팔딱팔딱 숨 쉴 것 같은 고등어와 삼치 그림으로 가득했다. 파시가 열리는 날은 당시 3,000여명이 오고 갈 정도로 성황이었지만 지금은 여수 등에 근거를 둔 대규모 선단이 등장하는 바람에 청산도 삼치 잡이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감상에 젖어 골목을 걷자 ‘느림카페’라고 적힌 표지판이 보였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는 카페. 느림을 모티브로 한 카페는 무엇이 다를까 궁금해 걸어 올라갔지만 아쉽게도 문은 닫혀 있었다. 아쉬움 마저도 여행의 일부가 아닐까. 이렇듯 청산도의 느림은 발길이 닿는 거리 곳곳에 있었다.

계단을 내려와 다시 거리를 걸었다. 완도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전 흔적만 남아있는 옛 선술집 사이, 고소한 김밥냄새를 풍기는 오래된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투박한 그릇에 담긴 어묵과 떡볶이를 먹었다. “여기서 살고 싶다”는 기자의 말에 사장님은 “청산도에 총각 많긴 한데”라며 웃었다.

바닷물에 통통 튀기는 배를 타고 다시 육지로 나오며 ‘유채꽃 피는 봄이 되면 청산도에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는 청산도처럼 예쁜 만남을 기대해도 될까? 느렸지만 누구에게 뒤처지지 않았던 청산도 여행. 한해를 다시 숨 가쁘게 보낼 계획을 하고 있다면, 마음속에 ‘쉼표’를 그려보자. 조금만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 청산도 가는 방법
광주에서 완도: 2시간 20분. 편도 15,400원
완도 여객터미널에서 청산도 도청항: 1시간. 편도 7700원 (하루에 배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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