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시의 경우, 독서와 만남을 통해 필자에게 수많은 울림을 주어 왔으며, 이는, 그가 반드시 참조해야 할 뛰어난 사상가라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그에 대해 써야 할 충분한 조건이 된다.

그러나 문제가 단순히 그의 사상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유를 통해 여기의 현실과 정치적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데에 있다면?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기 이전에, 낭시 자신이 혁명에 대한 물음에 대해 답하는 자리에서 현재 진행 중인 남미의 혁명적 상황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은 사실 유럽과 부유한 나라들만을 기준으로 말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던 것이 기억났다. 또한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낭시의 가까운 동료이자 사상적 동반자였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자신의 해체가 과연 프랑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적용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는 한 러시아 철학자에게 이렇게 답했던 것도 기억에 떠올랐다.

“저는 프랑스어 텍스트들을 가지고 작업을 합니다. 또 제게 중요해 보이는 어떤 특수한 상황들을 대상으로 작업하곤 하죠. 하지만 제 자신이 분명히 인식하고 있고, 또 종종 독자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싶은 것은, 해체란 대단히 개별적인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것이 발생하는 여러 다양한 구체적인 조건들에 깊이 의존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삽화=장유진 기자
그러므로 예컨대 만일 당신이 해체의 프랑스적 모델을 당신 나라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시키려 한다면, 그 시도는 실패로 귀결되거나 별다른 유의미한 결과를 내놓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감히 그렇게 하라고 충고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저는 이렇게 제안하고자 합니다. 각자 자신이 처해 있는 특수한 역사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상황에서 해체의 고유한 방법을 발명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무위’든, ‘공동체’든, ‘공동-내-존재(l'être-en-commun)’든 낭시의 개념들을 통해 한국의 현재를 조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적어도 필자에게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또한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상황과 연관해 이곳의 정치 현실에 대한 견해를 그에게 구했을 때, 그가 이메일을 통해 답하면서 그러한 상황에서 남한과 북한은 공동체·민족·국가·민중 등에 대해 다시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실험실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마지막에 덧붙였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한 그의 지적을 들으면서, 그가 사유는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논리적인 차원에서만 해명될 수 없으며, 한 지역의 특수한 역사적․문화적․정치적․사회적 맥락에 강하게 연동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회와 시간적․공간적 배경․상황․경험들이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어떤 이론을, 그 사회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뿐더러 허위로 귀착될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그 이론을 정해진 기준이나 답으로 생각하면서 그렇게 할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철학적 사유(철학이라는 한 분야에 속하는 사유가 아니라 어떤 근본적 문제에 접근하는 사유)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찍이 지적했던 대로, 책 속의 이론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놀람(경이, thaūma)”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놀람 가운데 있는 이러한 상태는 전적으로 철학자의 것이다”(플라톤). 이어서, “놀람이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최초의 사상가들을 철학적 반성에로 이끌었다”(아리스토텔레스).

의심의 여지없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오늘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의 ‘오늘날’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두 서양철학의 창시자의 말에서 결코 동서고금의 구별이 문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반성이든, 그것이 현실의, ‘여기 지금(hic et nunc)’의 구체적이고 단수적인 경험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이론과 책에서 출발할 때 ‘철학적 반성’에 이를 수 없을뿐더러 그 진정성조차 확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언제 어디에서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놀람’은 단순히 책을 읽고 이론을 숙지하다가 생겨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오직 세계에서 펼쳐지는 구체적인 어떤 사건으로 열리는 데에서 발생할 뿐이며, 오히려 기존의 책과 이론을 폐기시키는 데에로 나아갈 수도 있는 파괴적 힘을 갖고 있다. 물론 철학은 연역이나 귀납을 통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론에서 출발하지 않으며, 그 역동성은 언제나 현실에 잠입해 들어가는 힘으로부터만 보장된다. 가령 지극히 추상적인 이데아론을 만들어낸 플라톤의 경우도, 그의 전체 반성은 존경하는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적어도 그가 보기에, 정의롭지 못하고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당시의 그리스 사회의 구체적 현실에서 출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최종 목적이 정치적 관점에서 그러한 그리스의 현실을 개혁하는 데에 있었다. 모든 추상적 이론은 ‘여기 지금’의 어디인가에 맹아를 갖고 있다.

우리가 다른 곳이나 다른 시대에서 만들어진 이론(따라서 서양 현대 이론뿐만 아니라 한국 전통의 이론을 포함하는 모든 이론)을 따르면서도 구체적 현실 안으로 육박해 들어가 있다고 자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론이 살아 있는 경험에 앞서고 그것을 가로막고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좁혀서 이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소위 ‘유행’하는―이론을 뒤쫓는 경우에 있다. 그 경우 사회의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견해를 따름으로써, 결국 한 개인이 자신의 어떤 생생한 경험과 만났을 때 발생하는 ‘놀람’과 마주하지 못할 가능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그 단수적(單數的)이고 구체적인 경험이 가져오는 문제에 집중하고 그 안으로 들어 갈 계기를 더 쉽게 놓쳐 버리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유행과 상관없는 어떤 이론에 들어가 있는 경우, 아마 그 계기를 붙들 수 있는 가능성이 어느 정도 높아질 수 있겠지만, 결국 이러저러한 이론의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과연 어떤 문제 아래에 놓여 있는가, 아닌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를 포함해서 누가 감히 자신의 ‘진정한’ 문제에 들어가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누구도 ‘그렇다’라고 확실히 대답할 수 없는 물음, 매우 어려운 물음이다. 우리는 어떤 이론을 해답이라고 간주하고 따르면서 이곳의 현실을 이해하고 행동한 결과, 난관에 봉착해 좌초했던 20여 년 전의, 즉 1980년대의 경험을 다시 되돌려 보아야만 할 것이다.

당시 진보 진영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한국에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변혁이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맑스-레닌주의나 주체사상에 깊이 경도되었고, 이 두 이론을 거울로 삼아 자신들이 속해 있던 사회의 흐름과 문제들을 바라보았을 뿐만 아니라 ‘해답’을 마련했다. 그들은 당시 남한을 혁명 전야에 놓여 있다고 판단하면서 노동자들과 더불어 민중을 혁명 세력으로 간주하고 사상적으로 무장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1989년 전 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던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현실적 사태 앞에서, “한국이 여전히 일제 식민 치하,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 시기에 놓여 있다는 시간관념을 갖고 있었던” 민족해방론(NL: National Liberation)과,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전형적인 계급 사회의 관념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았던”(김동춘) 민중민주론(PD: People's Democracy)은 자체 와해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일군의 학생들․지식인들이 너무나 많은 경우 자신들이 속해 있었던 집단 바깥의 사회에서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고 이후에 급속히 중산층의 삶으로 편입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실망을 가져다주었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변절’한 그들의 양심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이론을 현실적 경험의 구체적 맥락들과 문제들을 떠나서 그대로 수용하는 관념성이다. 그들은 도덕적 측면에서 ‘변절자’이기 이전에, 즉 자기 자신을 속이기 이전에 관념의 자율적 자기 증식에 속았을 뿐이다. 관념이 관념에게 속았을 뿐이다.

80년대의 그러한 경험은, 대학 강단과 스스로를 차별화하고 현실과 역사에 밀착해 있다고 자부했던 진보세력이 당시의 ‘여기 지금’과 다른 시공간에서 산출된 이론을 과연 올바른 방식으로 받아들였는가라는 물음으로 이끌려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어서, 강단 안에서든 밖에서든 우리가 과연 어떤 이론을 하나의 ‘답’으로, 또는 적어도 완성된 틀로 간주하고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이제는 벗어났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우리가 목격했던, 80년대에의 이론과 현실 사이의 그토록 큰 괴리는 극단적인 예에 불과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다른 곳에서 완성된 이러저러한 이론적 틀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있지 않은가. 어떤 이론을 적용하기에 앞서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 그리고 현실과 이론 사이의 정합성에 대한 검토가 아닌가…….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