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페이’라는 신조어를 들었다. 자신의 열정으로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청년실업 100만의 시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그들의 아픔을 거짓으로 위안하며 착취한다. 이명박 정부는 젊은이에게 눈높이를 낮추라고 충고하더니 박근혜 정부는 ‘고용 유연성’을 확대하여 일자리 창출을 유도하겠다는 창조적 발상을 선보인다. 이렇게 두 정부의 정책은 완벽한 일관성을 보여준다. 기업에게 더 많은 혜택과 자유를 부여하면서 청년들에게는 당장의 일자리를 위해 비정규직이라도 감내하라는, 젊은이가 가진 단 하나의 자산인 열정을 내던지고 모진 현실의 노예가 되라는 주문을 건다.

대학생들을 바라보면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영어, 학점, 자격증, 온갖 종류의 ‘스펙’에 지쳐 있는 젊음, 그런 노력에도 자신 없는 미래에 불안해하는 젊음, 저학년 때에는 미래에 대한 당찬 포부를 말하던 그들이 고학년이 되어서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젊음에게 나는 한없는 슬픔과 연민을 느낀다. 반면에 꿈을 좇다 쓰러지고 거꾸러질지라도 꿈조차 꾸지 않는 젊음, ‘스펙을 쌓는’ 경쟁으로 그들을 내몰고 있는 이 사회가 그들에게 앗아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 젊음, ‘열정 페이’를 지불하게 하여 그들의 열정을 소진시키고 있는 현실에 분노하지 않는 젊음에게 나는 아쉬움을 넘어 참담함을 느끼기도 한다.

지난 10월 유럽연합의 정상들은 청년 실업을 주제로 하여 밀라노에 모였다. 비록 64억 유로의 기금 사용 외에는 구체적인 정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 문제가 유럽이 당면한 최우선의 문제라는 인식을 확인하고 합의한 자리였다. 그런데 유럽 젊은이들의 분노와 항의가 없었다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최근 전남대 총학생회 후보들의 공약은 대략 ‘등록금 인하’, ‘학내 교육과 복지 환경 개선’ 등을 목표로 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우리대학만으로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의 대학생들은 적은 등록금으로 좋은 환경의 대학에서 공부하면 미래가 보장된다고 믿는 것일까? 그들의 대학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취업의 문제는 누군가 대신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국제노동기구의 ‘고용보조지표’에 따르면 한국의 체감 실업률은 10.1%에 달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청년 실업률이 전체 실업률의 두 배에 달하는 유럽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한국의 청년 실업률은 20%에 이르며 이는 유럽연합의 청년실업률과 동일한 수준이다. 그런데 우리의 젊은이들은 왜 침묵하는 것일까? 이 스펙의 경쟁에서 자기는 승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아픔을 청춘의 특권으로 인정하기로 한 것일까? 아픔을 느끼는 자가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아무도 그 아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열정은 온전히 젊은 그대들의 것이며 누군가 그것을 빼앗거나 상처 내서 아픔을 느낀다면 분노하고 저항해야 하는 것도 그대들이다. 분노를 잃은 열정, 그것은 창조에 이를 수 없는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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