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0월이면 외신으로 타전되는 노벨상 수상자 발표로 인해 한국 사회와 학술ㆍ문화계는 잠시 찜찜한 증후군을 앓는다. 주지하다시피 노벨상의 상금과 메달의 재원은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유산에 기반한 노벨재단에서 지원하는 만큼 이 상은 한 개인의 유지에 따라 설립된 비영리재단이 주관하고 있다.

수상자의 선정과 상의 수여 기관도 분야에 따라 스웨덴 왕립 과학원, 카로린스카 의과대학교 노벨총회, 스웨덴 중앙은행, 스웨덴 아카데미 등 제각각이며 평화상은 스웨덴도 아닌 노르웨이의 노벨 위원회에서 수상자를 결정하고 수여한다. 때문에 노벨상은 일견 명목상으로는 그 어떤 공신력을 담보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수상자의 대부분이 서구 유럽인이었고, 평화상의 선정 기준은 해마다 논란이 되었으며, 1969년부터 수여되기 시작한 경제학상은 철저히 자본주의 경제학과 자유주의에 편향되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해마다 노벨상 발표를 전후하여 학계와 언론의 노벨상 후보에 대한 섣부른 예상과, 그 기대만큼이나 실망으로 점철되는 후폭풍의 증후근은 2세기에 접어들도록 노벨평화상 1명밖에 배출하지 못한 우리 현실에 대한 불필요한 열등감과 과민반응일지도 모른다. 식민지시대와 내전을 겪고 분단된 현실에서 세계 무역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우리로서는 이제 노벨상에서 자유로워질 필요도 있다는 주장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이 주는 의미와 무게감은 그리 단순하지 만은 않다. 노벨상의 권위와 위상은 결코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한 사회의 총체적 수준을 가늠하는 매우 유효한 준거임은 엄연한 현실이다. 수상여부를 차치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와 학계가 노벨상에 근접한 수준의 풍토와 성과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자성이다. 일본 축구에 1:0으로만 져도 광분하면서도 비유하자면 과학 분야에서만 19명의 노벨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에 19:0으로 지고 있는 우리 현실을 촌평한 모 일간지 기사는 다소 자극적이지만 흥미롭다.

물론 우리는 적잖은 분야에서 노벨상에 근접하거나 그 이상의 성과를 올리고 있지만, 연구와 고등교육의 정점에 있으며 실질적으로 노벨상 배출의 산실이 되어야 할 우리의 대학 현실은 암담하다. 노벨상 대부분이 수십 년간 진행되고 축적된 단일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수상된 점을 고려하면, 현재 한국 학계의 획일적이고 계량적인 평가시스템과 열악한 지원시스템, 그리고 소모적이고 관료적인 행정시스템에서는 장기적이고 창의적인 연구 결과를 결코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의 고도성장은 분명 현재의 성과를 이루었지만, 보다 성숙한 사회와 학문적 풍토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초 학문 분야에 대한 과감하고 장기 지속 가능한 지원이 필요하다.

노벨상 각 분야의 선정 기관은 다르지만 공통된 선정 기준이 ‘인류문명 발달에 대한 학문적 기여’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국의 성장과 개인의 현시적 성과에 급급했던 한국 사회와 대학이 그 분야를 막론하고 향후 인류 문명에 기여하는 보편적 가치와 성과를 함양하고 배출할 수 있을지도 고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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