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장유진 기자
자연법처럼 군림하는 시장기계, 우리는 도처에서 축소될 대로 축소된 삶의 영역을 점유하고 있는 인간들을 목도한다. 경영은 오래 전에 정치의 자리를 꿰찼으며 과학은 기술과학의 이름 아래 허위적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예술시장이 예술을 그리고 상업화된 사랑이 사랑의 가치를 침식하고 있음을 굳이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바디우는 진리가 생겨나는 4개의 공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정치, 과학, 예술, 사랑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어떻게 수용해야 할까?

사회 변혁 실천의 '코뮌주의적 불변항'  
리오타르는『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거대서사의 몰락’으로 이 시대를 진단한 적이 있었다. 알랭 바디우는 화석과 같은 철학자이다. 이 노철학자는 거대서사(진리)의 몰락을 믿지 않는다. 그는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던 철학자들(푸고, 데리다, 들뢰즈, 리오타르 등)이 의심하는 진리철학을 완강히 수호하는 시각을 견지한다.

이들의 포스트모던적 수사는 그의 철학적 신념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세계는 욕망을 지닌 몸체들의 그것이며, 그곳의 심층에 강도들이 있다. 다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율적 주체도, 유기체적 개체성도, 의식도, 시니피앙도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은 그 자체로는 중심도, 기원도, 목적지도 없다.

들뢰즈가 옹호하는 이러한 카오스모스(chaosmos)는 엄격성, 명증성, 영원성을 철학의 속성으로 삼으려는 바디우에게 한갓된 구호로만 들릴 뿐이다. 그는 아테네의 태양이 사회 변혁을 담지한 합리주의의 복원을 이끌 것이라고 믿는다(『플라톤의 국가』, 2012). 사회 변혁의 실천에 있어 ‘코뮌주의적 불변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코뮌주의적 가설』, 2009). 물론 그가 말하는 코뮌주의는 과거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표방했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바디우의 철학적 여정
우리는 바디우가 걷는 철학적 여정에서 그의 철학적 지향점이 무엇인지 몇몇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1937년 모로코의 라바(Rabat)에서 태어났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수학 교사인 아버지는 후일 프랑스 남단의 도시 툴루즈 시장까지 역임한다. 아버지의 이러한 이력이 청년 바디우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상상될 수 있다.

그것은 비단 그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닐 것이다. 바디우는 아버지처럼 국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에는 파리 8대학의 교수가 된다. 훗날『존재와 사건』이라는 새로운 존재론을 정립할 미래의 철학자 바디우가 보내는 유년기는 서구의 전통철학의 전복을 야기할 참사가 발생한 시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은밀하게 자행된 종교전쟁은 전대미문의 야만성을 백일하에 드러낸다. 로고스의 종착역이 아우츠비츠라는 죽음의 캠프였던 것이다. 진리는 악으로 전화하여 인간 폭력의 끝을 낳았다.

이 파국 앞에 철학은 자신의 전통을 기각하고 새로운 지대로 자리를 이동할 수밖에 상황에 봉착한다. 서구의 철학이 특권을 부여해왔던 주제들, 이를테면 존재, 자기동일적인 주체와 보편적 진리 범주는 사멸하든지 또는 자취를 감추어야 했다. 이처럼 탈형이상학적 사유체계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유양식은 전통철학의 존재론 역사를 파괴하려는 것과 근본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존재론과 함께 주체의 지위도 된서리를 맞는다. 구조주의적 사유는 주체와 역사성을 배제하면서 사물 자체의 속성과 기능이 아니라, 사물들 간의 관계에 따라 사물의 참된 의미가 결정된다는 인식을 상정한다. 사물은 다른 사물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 관계 속에서 사물이 지니는 위치에 따라 그 의미는 규정되며 변화한다. 주체의 자리가 보장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는 다수의 철학자들로 하여금 ‘차이’, ‘소통’, ‘타자’, ‘상호주체성’ 등을 주요 의제로 삼는 계기를 제공한다. 우리는 비참함으로 얼룩진 타자의 얼굴을 제시하면서 유죄성과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윤리적 주체의 극단을 진술하는 레비나스를 기억한다.  


철학의 복원과 현실참여
이론과 실천에 있어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철학의 복원과 현실 참여는 바디우의 ‘충실성’이 된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사르트르의 구호와 알튀세르의 과학적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알제리에서 행해지고 있는 패권국가 프랑스에 의한 민간인의 학살과 만행에 대한 목도는 평생에 걸쳐 지속될 바디우의 철학적 개입을 결정짓는다.

그의 청년기와 일치하는 1960년대의 서구는 사회의 변혁을 문자 그대로 믿었던 시대이기도 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의 중국에서 이뤄낸 문화대혁명, 카스트로와 게바라 등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혁혁한 전과는 새로운 공동체를 희망하는 그의 정신을 고양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회 정의 및 변혁을 실천하고자 하는 좌익적 사유는 시장경제를 토대로 한 서유럽, 이를테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정치현장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했다.

바디우는 이러한 상황에 한층 고무돼 열렬한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자로 변신한다. 그가 이 시기에 몸소 체험하는 68년 5월 운동은 존재 질서의 공백에서 분출하는 진리를 담지하고 사건이다. 풍속(風俗), 즉 오랫동안 지속해 온 인간 행동양식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고, 자기 자신과 타자에 대한 인간의 행동에 있어 구태적인 잔재들이 폐기되며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개인들이 대량적으로 사회의 전면에 부상한다. 인간의 조건, 이를테면 인간이 만들어지는 물질적?지적?성적?정치적?의학적 환경이 확연히 바뀌며 사랑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세상을 엄습한다. 이 사랑 또한 기존의 지식체계를 교란하는 미증유의 진리가 생산되는 공정 중의 하나가 된다(『사랑 예찬』, 2009). 그것은 새로운 존재 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사고의 엄격성과 힘을 믿는 철학자
철학의 혁신과 해방적 실천, 이는 바디우 자신이『윤리학』(1993)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세계와 맞서 싸우고자 할 때 지녀야할 그 자신의 윤리인지 모른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위한『코뮌주의의 선언』을 선포하듯이, 바디우 또한 1989년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학문이 탄생한 것처럼『철학을 위한 선언』라는 제목의 저술을 발표한다. 이 저술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불을 지폈던 역사의 종언, 그러므로 철학의 종언에 대한 반박과 철학적 불변항인 존재, 진리, 주체의 범주의 혁신의 통한 새로운 철학의 출발을 선언하고 있다. 바디우의 이러한 선언은 한 해 앞서 출간된『존재와 사건』에서 이루어낸  일정한 성과에 기인한다. 그는 이 저술에서 수학은 존재론이고 그리고 사건이라는 이름 아래 존재에 새로운 것이 발생한다는 두 개의 명제를 천명한다. 수학적 존재론이 드러내는 것처럼 대상을 갖지 못한 철학은 이제 진리를 생산할 능력을 상실한다. 그에 대한 보상책으로 바디우는 인식과 사고와 분리하여 사고를 철학에 귀속시킨다.

이 사고는 존재의 질서에 공백이 편재함을 입증한다. 이 공백은 존재의 질서 속에 사건의 가능성이 내재함을 의미한다. 그는『조건들』(1992)에서 이 점을 더욱 더 명확하게 밝힌다. 바디우는 철학을 철학의 조건들로부터 분리시킨다. 철학적 임무는 진리를 생산하는 데 있지 않다. 철학은 다만 언어 밖에서 출현하는 진리에 개입해 사후적으로 그것을 명명할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과학적 인식의 공백을 상상력으로 은폐하려는 시도로 비판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고의 엄격성과 힘을 믿는 철학자이다. 정치·과학·예술·사랑에서 생산된 진리들에 대한 철학적 사고는 철학자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철학의 역할은 이 진리들을 압류하여 진리성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다. 이는 후술하기로 하자.

이상적인 공동체를 향한 희망
바디우의 시각에 의하면 이러한 유물론적 존재론은 결코 사변적 형이상학이 아니다. 이 존재론은 궁극적으로 데모스(인민)의 현실을 겨냥한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코뮌주의의 선언』이 천명하고 있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희망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이론 작업과 더불어 싸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낱말이 텅 빈 시니피앙임을 너무 잘 인식하고 있으며, 이 점에 있어 랑시에르의 정치관을 어느 정도 공유한다. 인민이 정치의 주역인 적이 있었던가? 이 명제가 역사에서 한 번이라도 실현된 적이 있었는가?
 
대의정치는 출발부터 과두정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민주주의 하에서도 본질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지배 엘리트는 여전히 이름만 다른 부의 축적자, 신성과 연계된 집단(종교), 특권적인 가계(家系), 지식인과 전문가 등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선택된 자로 자임하고 자신들을 지도자로 선별한다. 바디우는 2007년에 출간된『사르코지는 무엇의 이름인가』에서 현직 대통령인 사르코지를 ‘쥐 인간’으로 폄하하면서 그를 나치 독일과 공모했던 비시(Vichy)체제의 패탱 장군과 같이 반동적인 인물로 규정한다. 노동자와 이민 그리고 기회를 얻지 못해 유랑하는 젊은이들을 표적으로 삼는 공포정치는 공동체 없는 통치, 치안질서의 영속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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