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보존 안 되고 있는 현실…‘빨갱이 트라우마’ 여전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과 제주4·3사건은 연이어 촉발된 현대사의 비극으로 불리지만, 유독 여순사건은 이데올로기적 색채가 더 강하게 덧씌워져있다. 여전히 피해자들은 트라우마속에 살고 있고 진상규명도 제대로 되지 못했다. 여순사건 66주년을 맞아 그날의 현장으로 가봤다.

▲ 총구를 겨누고 있는 군인과 항복 표시를 한 시민.(사진=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쩌그 남국민핵교 길목꺼지 바래다디릴 것잉께 싸게 집으로 가시씨요. 25일부텀 여순지구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얐는디, 밤중에 댕기다가 큰탈난께요. 암호 못 대면 무조건 발포해 뿌요. 요새 죽으면 개값만도 못헌께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대사다. 이는 여순사건 당시 계엄령이 공표됐을 때를 배경으로 하며, 당시 민간인을 타당한 이유 없이 즉결처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여순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민간인이 1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여순사건 말하는 자 모두 다 빨갱이
여순사건이 발발한지 66년이 지난 지금도 여순사건 유족들은 트라우마 속에 살아가고 있다. 여순사건 유족회는 무려 50년 동안 생기지 못하다가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1998년 만들어졌다. 유가족들은 가족이 죽어도, 지인이 눈앞에서 죽어도 입조차 열지 못 했다. 여순사건을 말하는 자들은 빨갱이가 됐고 끌려가 처형당하기 일쑤였다.

실제로 그랬겠나 싶겠지만, 과거 종산국민학교(현 여수 중앙초등학교)에서는 더 심한 일도 벌어졌다. ‘흰 고무신을 신은 사람’, ‘머리를 짧게 깎은 사람’, ‘지나가던 학생들’은 모두 반란군 협력자 의심을 받고, 일부는 학교 뒤 구덩이로 끌려가 즉각 총살을 당했다.

이오성 여순사건위원장은 “대부분의 민간인들이 빨갱이는 아니다”며 “정부는 이미 죽은 사람을 좌익 활동을 했다고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고 밝혔다. 그들 대부분은 빨갱이가 아니었지만, 66년이나 지난 지금도 유가족에 대한 오해는 지역사회에 만연해있다. 여순사건 합동 위령제를 처음 연 1998년도만 해도 “그런 빨갱이 추모식 뭣 하러 해”라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 위원장은 “아직까지도 트라우마로 인해 유족회에 가입한 유가족의 반 이상이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방치된 유적지, 잊히는 여순사건
보존되지 못하고 있는 여순사건 유적지를 보면, 여수는 여순사건을 조용히 잊기 위한 수순에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125명의 민간인이 암매장당한 ‘만성리 학살지’에는 “여순사건의 민간인 집단희생지로서 진상규명을 진행 중이므로 훼손하지 말라”는 여수시장의 말이 적힌 푯말과 거미줄로 뒤덮인 ‘만성리 학살지’ 영문 설명이 있을 뿐이다.

 ▲ 여수 만성리에 위치한 ‘형제묘’의 모습. 관리가 안 돼 수풀이 우거졌다.

만성리 학살 피해자를 위해 만든 ‘형제묘’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콘크리트로 된 계단에 우거진 풀과, 무덤 앞에 노인 말라비틀어진 흰 국화는 사람들의 왕래가 적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수상비행장으로 쓰였던 14연대 주둔지는 더 심각하다. 이곳은 역사적인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유적지에는 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다만 지역 사회단체에서 세운 표지판만이 과거 여순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해마다 시월이 오면 여수는 어쩐지 더 조용하다. 우리는 여수를 '빨갱이 소굴'이라며 금기시했고, 지역 사람들도 여순 사건을 겪으며 '나서면 안 된다'는 말을 마음속에 각인시켰다. 그 결과 여순사건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로 남아있다.

여순사건에 희생당한 시민. 그의 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사진=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여순사건은 해방 정국의 혼란과 극명한 좌우대립 속에서 태어났다.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철수’를 주장한 여수 14연대는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불복해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을 일으켰다. ‘3일 천하’로 불릴 만큼 반란군의 위세는 짧았지만, 사상자는 많았다. 정부군이 투입되면서 반란군 진압 및 동조자 색출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많이 죽었다. 여수에서만 5,000명으로 추정되며 전남 동부 6군(순천, 남원, 구례 등)을 포함하면 만 명이 넘게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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