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장유진 기자
정치의 세 개념
1990년대 이후 에티엔 발리바르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체 작업을 넘어 진보 정치를 쇄신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을 수행해왔다. 특히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다움'은 1990년대 이후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개념적 모체를 명료하게 보여준다(『대중들의 공포』에 수록).

첫 번째 정치의 개념인 해방(emancipation)은 근대 민주주의 정치는 초월적이거나 자연적인 토대를 갖지 않으며, 피억압자 자신의 해방의 역량을 유일한 기초로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1789년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선언』(이하 『선언』으로 약칭)에서 이러한 해방의 정치의 원칙이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었다고 본다.

반면 두 번째 개념인 변혁(transformation)은, 정치를 규정하는 물질적ㆍ상징적 조건들, 특히 지배 구조 및 권력 관계들의 변혁을 정치의 중심적인 대상으로 삼는 정치를 의미한다. 그는 마르크스와 푸코의 사상을 변혁의 정치의 두 가지 경쟁적인 모델로 제시한다.

세 번째 정치는 시민다움(civility)의 정치로, 이는 정체성들의 폭력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를 가리킨다. 세 번째 개념이 필요한 이유는, 해방과 변혁의 정치는 능동적인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전제할 뿐, 지배 구조의 강화로 인해 그러한 주체의 가능성이 잠식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민다움의 정치는 극단적 폭력을 퇴치하거나 감축하기 위한 반(反)폭력의 정치다.

평등자유명제
『선언』은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발표된 문서로, 근대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텍스트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프랑스 헌법은 『선언』을 헌법 전문(前文)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선언』을 이중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한편으로 중세의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지배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선언』은 정치적 해방을 선언하고 있지만, 『선언』이 말하는 정치적으로 해방된 인간 내지 시민 대부분은 아무런 소유도 없이 자본의 굴레에 예속된 프롤레타리아들이다. 따라서 『선언』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할수록, 경제적 불평등과 착취의 현실은 은폐되고 만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보기에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선언』의 의의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해방의 정치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도 장애가 된다. 발리바르는 『선언』의 핵심은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를 긍정한 데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가 뜻하는 것은, “피압제자들의 해방은 오직 그들 자신에 의해 쟁취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약간 부연해보자. 근대 이전까지 정치 공동체는 한편으로 신의 율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다른 한편으로 자연적인 질서(인간 본성이나 혈통과 같은)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선언』이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선언하면서, 정치 공동체는 더 이상 신성하거나 자연적인 질서에 기초를 둘 수 없게 되었다. 곧 정치 공동체는 이제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고 보장하기 위해 세운 정치체가 된 것이다. 따라서 정치 공동체 안에 억압과 지배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근거는 피억압자들과 피지배자들 자신의 단결된 힘에서 찾아야 한다.

이는 곧 시민들의 평등 없이 시민들의 자유 없고, 또 역으로 시민들의 자유 없이 평등 없으며, 시민들 자신의 연대와 단결만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는 뜻이다. 발리바르는 이를 “평등자유명제”라고 부르며, 『선언』의 핵심에는 바로 이 명제가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이 명제는 1789년 당시에만 유효했던 명제가 아니라, 그 이후 역사적으로 존재한 거의 모든 해방 운동의 근거로 작용했던 명제다. 가령 19세기 후반의 여성운동, 20세기 초반의 식민지 해방운동, 20세기 후반의 흑인인권운동이 모두 이 명제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선언』과 그 핵심으로서 평등자유명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보 정치의 주춧돌을 이룬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주장이다.

시민다움

발리바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시민다움의 정치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는 오늘날의 세계에는 극단적인 폭력의 양상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폭력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하나는 초객체적 폭력(ultra-objective violence)이다. 이것은 가령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거나 고통 받는 아프리카, 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회용 인간’으로서 마약 밀매나 중노동에 시달리는 남아메리카 등에서 나타나는 폭력이다. 곧 사람들을 사물이나 도구로 환원해버리는 폭력이다. 이러한 참혹한 현실은 겉보기에는 자연재해나 전염병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다중적인 요인들에서 생겼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초주체적 폭력(ultra-subjective violence)이다. 이 폭력은 어떠한 진보적 변혁도 목표로 삼지 않는 희망 없는 반역, 목적 없는 폭력의 일반화(테러나 자살 폭탄 등을 포함하는) 같은 현상들을 가리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1990년대 이후 여러 차례 발생한 이른바 ‘민족 청소’나 대량 학살 등에서 나타나는 증오의 이상화 현상이다. 곧 자기 내부에 있는 타자성과 이질성의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민족이나 인종의 정체성을 순수하게 구현하려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도 그것을 구현하려고 하는 맹목적이고 초주체적인 의지 작용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극단적 폭력을 특수한 지역이나 경우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초객체적 폭력은 사람들이 단순한 사물이나 도구(또는 상품)로 취급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나타나며, 또한 초주체적 폭력은 개인들이 어떤 집단적인 권위나 이상(특히 민족주의나 인종주의)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속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정치의 개념들이나 문제틀로는 이러한 극단적 폭력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정치 문법은 그것이 착취이든 억압이든 폭력이든 간에, 그것에 맞서고 더 나아가 그것을 폐지하거나 철폐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를 자명한 것으로 가정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객체적 폭력과 초주체적 폭력이 공격하고 잠식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집단적 주체의 가능성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신자유주의와 새로운 공안 정치의 결합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극단적 폭력들에 맞서기 위해 발리바르는 원칙적으로 두 가지 정치를 결합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하나는 모든 헌정에 내재적인 구성적 봉기의 역량을 복원하고 확장하려는 운동으로서 시민권의 정치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 공동체를 탈본질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시민다움의 정치다. 정치 공동체를 어떤 특정한 정체성(가령 민족)을 지닌 시민들 위에 근거 짓지 않고, 좀더 개방적이고 다원화된 (탈)정체화의 과정 속에서 개조하는 것이 바로 시민다움의 정치의 목표다. 

따라서 발리바르에게는 “차이 및 평등의 권리와 동시에 연대와 공동체의 권리를 함께 요구하는 것”(『정치체에 대한 권리』), 그리고 그것을 담론과 실천, 제도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이 오늘날 진보 정치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진태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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