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시간’이 멈춰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시간이 멈춘다면 ‘존재’이라는 명제는 사라질 것이다. “인간의 존재는 시간 속에서 증명되며, 그 시간이 분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인류 기원부터 축적돼 온 지식과 경험을 ‘전수’하기 때문”라는 어느 신문의 기사는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좀 더 용이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시간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 어바웃 타임, 시간 여행자의 아내 등 많은 영화들이 시간을 소재로 하였다. 왜 우리는 이처럼 시간에 예민할 것일까? 그것은 바로 ‘존재 확인 본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늙고 죽는다. 시간에 대한 ‘한계 존재’인 인류는 상상으로나마 시간을 ‘과거로 돌렸다 미래로 갔다’하면서 존재감을 무한대로 연장하려는 본능을 현실이 아닌 영화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였을 것이다. ‘존재’와 ‘시간’ 두 명제는 묘하게도 닮았다.

좀 더 역사적으로 접근해 보자. 일반적으로 시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산업혁명이라는 데에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 같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 달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측정했다. 시간은 농경생활의 노동력 투입량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보다 높은 효율성과 노동생산성을 위해 1분 1초라는 정확한 시간 측정이 가능해야 했다. 시간은 경제성과 곧바로 연결되었고 이것은 경쟁력의 상징이 되었다. 눈치 빠른 자본 사회는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통치 권력의 주된 관심사였다. 고대 이래 지금까지 ‘시간 질서’는 중요한 통치 기제가 되어 왔다. 전통사회에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노력을 보노라면 경외심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가히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예를 들어보자. 동양의 천문 역법(曆法)에서 한 해의 천문 주기는 동지를 시작으로 전개한다. 그 동지가 들어있는 달은 음력 11월이다. 그래서 한 해의 달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11월의 초하루(朔)를 구해야 했다. 여기에서 삭(朔)이란 태양과 달과 지구가 일직선의 위치에 있는 시간을 말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고려 성종 2년(983) 11월 동지와 삭(朔) 시간을 구해보자.

①7,070,300 × 504,000   ②14,300 × 44,055 ÷ 504,000  ③490,500 ÷ 8,400 
④7,070,300 ÷ 248,057  ⑤ 124,704 × 91,371 ÷ 248,057

고려인들은 위와 같이 몇 단계를 통해 983년 동지 시각과 11월 초하루 날짜와 朔 시간을 계산해 내었다. 이처럼 정확한 시간을 계산해 냈던 이유는 정확한 시간이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의 가치를 일찍부터 알았던 통치 권력은 그 시간을 주재하고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너무도 쉽게 간과하였던 시간은 이렇게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측정되고 이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굳이 계산해 낼 필요도 없다. 다만 그 시간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빼앗기면 당신의 시간은 마치

 
멈춰버린 것과 같다. 빼앗긴다면 ‘존재’도 사라진다.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