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종이

어떤 종이에는 삶이 적히고
어떤 종이에는 죽음이 기록된다
어떤 죽음이 삶을 여기까지 끌고 왔음을
우리는 익히 보아 알고 있다, 예컨대

녹슨 못으로 은박지에 새긴 글자
부러진 연필로 갱지에 써내려간 문장
등사기로 밤새 찍어냈던 분노
봄비처럼 흐트러지던 총탄
몸에 불을 붙이던 선배
광주의 오월 햇살
타오르던 함성

신문 위에는 먼지가
산맥처럼 쌓이고 손가락에 침을 묻혀
지문을 남긴다, 종이가 보이고
마치 거울처럼 호수처럼, 잔물결처럼
흔들리는 우리가 비추는 신문들,

어떤 종이를 지우는 것은
어떠한 종이다
사람의 역사를 쓰고 지우는 것은
당신이라는 새로운 종(種)

지난 시간을 넓은 등에 업고
다가올 시간이 느린 걸음을 옮긴다
어떤 종이는 이렇듯
확실하고 바른 자세로
삶과 죽음의 가운데서
치열하다.

 
서효인 시인(국어국문·00)
- 1981년 전남 목포 출생
- 2006년 '시인세계' 등단
-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2011)
-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2012)
- 제 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
-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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