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팽목항에서 봉사중인 용미연 씨의 모습(제공=KBS)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팽목항으로 향하는 셔틀버스 안, 기자를 포함해 3명이 있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침묵이 이어졌다. 한 아저씨는 텅 빈 자리를 보고 “쯧쯧. 그렇게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더니”라며 혀를 찼다. 그렇게 40여분을 달려 팽목항에 닿았다.

세월호 참사 발생 40일째인 지난달 25일, 팽목항에는 풍랑주의보가 내렸다. 잠수사들은 수색을 중단했고 팽목항의 천막들은 비바람에 흔들렸다. 바람소리와 실종자들의 귀환을 바라는 스님의 목탁소리가 한데 섞여 들렸다. 이따금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방파제 주위를 서성였고 방파제에 걸린 노란 리본들은 비에 젖어 휘날리지 못했다.

참사 발생 3일째인 지난달 18일부터 줄곧 팽목항에서 자원봉사를 해온 용미연 씨(환경해양·10)를 만났다. ‘단발머리 팽목항 소녀’라는 제목의 기사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는 막 도착한 구호품을 천막으로 부지런히 나르고 있었다.    

한 신문사에서 용 씨의 기사가 나간 뒤, 다른 언론사에서 여러 차례 그를 인터뷰 하려 했지만 거절했다. 하지만 <전대신문>과의 인터뷰는 고민 끝에 허락했다. 그는 “학교 신문사라서 응한 것도 있지만 실종자 가족들의 목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게 걱정돼 인터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지난 2월 졸업한 뒤 공부를 위해 서울에서 지내던 용 씨. 그의 4월 16일 아침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참사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도 ‘전원 구조’라는 언론의 보도를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상황은 계속 악화됐다. 뉴스를 통해 배가 가라앉는 모습을 보며 눈물만 흘렸다. 그는 “인터넷 번개(인터넷동호회 구성원들의 즉석모임)를 통해 4명이 모여 17일 밤 이곳으로 왔다”며 “쓰레기라도 주울 심정으로 무작정 내려왔다”고 말했다. 

다음날 새벽부터 일을 시작한 용 씨는 아수라장이 됐던 봉사 첫날을 떠올렸다. 그는 “(실종자)가족들 울음소리가 항구를 가득 메웠다. 오늘처럼 비도 엄청 내리고 파도가 심하게 쳤는데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컸다”고 말했다.

아무런 지휘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현장에서 용 씨는 맨손으로 담배꽁초를 줍는 일부터 시작했다. 봉사단체 부스가 설치될 때마다 부스를 찾아 일거리를 구했다. 밥 짓기, 죽 쑤기, 분리수거, 물품정리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같이 일하던 봉사자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도 그는 현장에 남았다.

용 씨는 이번 참사 후에 수면 위로 떠오른 이른바 ‘기레기(기자+쓰레기)’라 불리는 언론에 비판의 목소리도 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참사 초기에 기자들은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플래시를 터뜨렸고 각지에서 몰려온 언론사 차량들로 구급차도 지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과정들을 지켜본 그는 “기자들은 대책 같은 건 관심도 없었다. 사건 현장 보여주기에 급급했다”며 “도망간 회장 잡는 건 중요하지 않다. 언론이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뉴스 화면엔 밤새 수백 발의 조명탄들이 사고 현장을 밝혔지만, 현장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킨 그의 눈엔 조명탄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낮에는 태양에 얼굴을 까맣게 그을리고, 밤에는 핫팩을 붙이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는 텐트생활이 계속됐다.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용 씨는 팽목항을 떠날 마음이 없다. 차가운 바닷속에 가라앉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발걸음을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종된 아이들이 발견되면 어떤 기분이세요?” 기자의 조심스런 물음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용 씨는 “안타까운 마음보다 감사하단 생각이 먼저 든다. 정말이다. 이젠 감사하다”고 답했다. 그는 “뼈 하나라도 건져내는 게 팽목항에 남은 가족들의 간절한 바람이다. 선체인양은 필요없다”며 “실종자 숫자가 0명이 되는 순간까지 이곳에 끝까지 남겠다”고 했다.  

마지막 당부도 있지 않았다. “‘내가 가면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팽목항엔 아직 일손이 부족하다. 진도를 찾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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