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결코 혼자서 끼니를 해결하는 법이 없었다. 어쩌다가 아들이 늦는 날이면 여자가 퇴근하고 올 때까지 텔레비전만 보며 기다렸다. 대형마트의 한 유아복 매장을 다니는 여자의 퇴근시간은 오후 여덟시 즈음. 일주일에 한 번 마감을 맡은 날은 열시에 끝나곤 했다. 그러나 일찍 끝나는 날에도 마감을 할 때와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근소한 차이밖에 나질 않았다. 마감이 없는 날이면 여자는 핸드백 속에 전단지를 챙겨 나왔다. 일인당 이백 장씩. 퇴근 이후 근처 아파트 단지를 돌며 집집마다 전단지를 붙이는 게 마트 직원들의 또 다른 임무였다.

▲ 삽화=남현진(조선대)

여자가 맡은 곳은 늘봄아파트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매번 퇴근을 하고나서 버스를 타고 여자의 집으로부터 두 정류장 남짓 떨어져 있는 롯데칠성 사거리에 내려야 했다. 지퍼가 굳게 여며져 있는 핸드백의 어깨끈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여자는 언덕길을 올라 늘봄아파트로 향했다. ‘고객 사은 대잔치’라는 문구가 적힌 전단지에는 각종 생필품과 식품들이 요란하고 정연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여자는 유아복 매장 직원이므로 이런 유의 전단을 돌리는 것에 의문을 품을 법도 했지만 점주도 전단지를 챙겨 퇴근하는 마당에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늘봄아파트 20층에 올라 한 층 한 층 계단을 내려가면서 전단지를 돌리고 나면 아무리 빨리 하려고 해도 삼십분은 족히 걸렸다. 행여나 복도에 사람이 있을 때면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아닌 척 하느라 작업의 속도는 더 느려졌다. 일을 마치고 늘봄아파트에서 여자의 집까지 걸어가는 데는 또다시 삼십분이 걸렸다. 하루 종일 서 있느라 퉁퉁 부은 다리를 겨우 이끌고 돌아온 여자의 머릿속엔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여자가 남편의 저녁을 챙겨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집에만 오면 모든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만 봤다. 그날도 남편은 텔레비전에 시선을 박은 채 한손으로는 리모컨을 주무르며 밥을 차려달라고 했다. 아직 핸드백도 내려놓지 않은 여자가 여태 밥도 안 먹고 뭐했냐며 쇳소리를 내자 남편은 대꾸도 않고 담배를 든 채 베란다로 나가버렸다. 그런 날이면 아들 녀석은 동틀 무렵이 돼서야 집으로 기어들어왔다. 늦은 저녁을 차리고 바구니에 가득 쌓인 빨랫감을 세탁기에 밀어 넣은 뒤 대충 샤워를 마치고 나면 여자의 하루는 끝이 났다.

남편은 줄곧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다 잠이 들었기에 이들 부부가 한 침대에서 자는 날은 거의 없었다. 휴대폰 알람이 제대로 울리지 않아 한두 번 애를 먹은 뒤로 여자는 자기 전에 항상 아들을 불러 휴대폰을 맡겼다. 아들이 늦는 날에는 아들을 기다리다가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다. 여자는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잠을 자는 시간만이 여자에게 허락된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다.

여자가 순심에게서 온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것은 점심시간이 다되어서였다. 여자와 점주는 삼십분씩 교대로 밥을 먹었다. 식사는 물품창고 안에서 이뤄졌다. 본사에서 온 상품박스가 가득 쌓인 좁은 창고 안에는 상판이 유리로 된 원형테이블과 구내식장에서 쓸 법한 철제의자가 하나 있었다. 원형테이블은 여자가 싸온 도시락을 펼쳐 놓으면 가득 차버릴 정도로 작았다. 주어진 점심시간 내에 양치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여자는 거의 십분 만에 식사를 처리하는 게 버릇처럼 되었다. 도시락 통을 정리하고 핸드백에 넣은 뒤 칫솔과 치약을 들고 마트 입구 쪽에 있는 화장실에 가 양치를 하고 돌아오면 삼십분이 딱 맞았다. 때문에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메시지에 기억날 듯 말 듯한 이름이 적혀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잡고 마냥 골똘히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문득 모르는 사람에게 온 메시지를 함부로 열었다가는 통신요금 폭탄을 맞는다던 남편의 말이 떠오른 것도 있었다. 그러나 ‘순심’이라는 이름은 그날 하루 고객응대를 하는 와중에도 여자의 뇌리 한편에서 자꾸만 기웃거렸다.

다시 여자가 그 메시지를 확인한 것은 퇴근 이후 전단지까지 돌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서였다. 우연히 네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며 마침 다음 달에 동창회가 있으니 꼭 참석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번호로부터 온 다음 메시지에는 ‘○○초 14회 동창회 연결 하시겠습니까’라는 파란색 글씨가 적혀있었다. 이 번호가 여자가 기억하고 있는 그 순심의 번호가 맞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여자가 ○○초 14회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가세가 기울면서 중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에게 그것은 유일한 학적이었다. 여자는 휴대폰의 달력 버튼을 눌러 순심의 메시지에 적힌 날짜를 확인해보았다. 여자가 마감을 맡은 날이었다. 설사 마감이 아닌 날이라 하더라도 동창회에 참석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날 퇴근을 한 여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다 잠이 들었는지 코까지 골며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고 방에 있던 아들은 고개만 불쑥 내민 채 인사를 하고는 다시 들어갔다. 여자는 안방에 핸드백만 내려놓고 아들의 방으로 향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아들은 여자가 방에 들어서자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며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늘 대학생인 아들에게 물어봤다. 예전에는 남편이 해주었던 역할이었지만 이제는 아들에게 물어보는 게 더 편했다. 여자는 아들에게 순심의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여자의 얘기를 듣고 난 뒤 아들은 아까의 파란색 글씨를 눌러 동창회 모임에 연결할 수 있는 어플을 깔아 주었다.

혼자 떠들고 있는 텔레비전 전원을 끄고 밀린 설거지와 세탁물을 처리한 여자는 샤워를 하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여자는 충전중인 휴대폰을 들고 동창회 어플을 켰다. 아까 아들이 알려준 사용법을 더듬어가며 몇 번 버튼을 눌러보던 여자는 곧 그 동안 꽤 여러 번의 동창회 모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 올라온 사진 속 몇몇은 여전히 옛 모습이 남아있던 탓에 여자는 이불 속에서 웅크린 채 킬킬대다 잠이 들었다. 그 밤 여자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여자는 교복을 입은 채 잔디밭에 엎드려 순심과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는 희숙이 아무나 이기라며 신이 나서 응원을 하고 있었다. 잠을 자는 여자의 입가에 가냘픈 웃음이 새겨졌다.

*

여자가 일을 그만 둔 다음날 가장 먼저 한 일은 집 청소였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난 여자는 주전자로 끓인 물에 커피믹스를 타 마신 뒤 본격적으로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화장실 거울과 벽타일에 물을 뿌리고 세제를 묻혀 솔로 닦아내자 검은 땟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욕조와 세면대의 물때도 그렇게 닦아낸 뒤 바닥에 락스를 뿌리고 나자 화장실 청소가 마무리 되었다. 여자는 청소를 할 때면 늘 화장실부터 시작했다. 바닥에 락스를 뿌리고 나면 얼마간 소독이 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안방과 거실의 천장에 매달아 놓은 커튼을 분리해 대야에 담고 옥시크린을 풀었다. 커튼은 언제 빨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공중에 매달려 먼지를 머금고 있었다. 진공청소기로 온 집안을 한바탕 헤집고 다닌 뒤에는 물걸레로 바닥을 훔치기까지 했다.

베란다에 놓인 남편의 재떨이는 비우고 호스로 물을 뿜어 난간의 거미줄까지 쳐냈다. 설거지를 한 뒤 퐁퐁으로 가스레인지에 엉겨 붙은 기름때도 벗겨냈다. 아들 방에 가서 베갯잇과 이불잇을 벗겨내 세탁기에 집어넣고 수건은 모아서 삶았다. 마른 빨래는 걷어서 개키거나 다림질을 하고 재활용과 음식물 쓰레기까지 버리고 돌아오니 청소는 끝이 났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정오가 훌쩍 지나 있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기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여자는 지난번에 사놓은 자반고등어를 냉동실에서 꺼내 싱크대에 놓았다. 땡땡 얼어붙은 고등어는 아들이 돌아올 즈음이면 굽기 좋게 녹아 있을 것이었다. 전기밥솥을 열어 밥이 있는지를 확인한 여자는 더 이상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세탁기가 도는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식탁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는 텔레비전을 틀어 연속극 재방송을 보기 시작했다. 이미 다 본 것이었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할 게 없었다.

지난 이십 여 년 동안 여자는 일을 쉬어본 적이 없었다. 젊은 시절에는 제약회사 공장에 잠깐 다녔다. 아들이 생기는 바람에 남편과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뒤로는 줄곧 아동복이나 유아복 매장에서 근무를 했다. 싹싹한 성격에 인상도 좋아 장사가 체질이라는 소리도 많이 듣고 다녔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즈음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도산했다. 그 과정에서 사장의 보증을 섰던 남편은 하루아침에 엄청난 빚을 지고 돌아왔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진 여자는 지인의 얘기를 듣고 보험회사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회사에서 쫓겨날 무렵 여자에게 남은 것은 딱 벌어 쓴 만큼의 빚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덤이었다. 아직 젊었던 그들 부부에게 그간 만져보지도 못했을 만큼의 큰 빚은 삶에 대한 다른 욕망들을 짓누르는 족쇄가 되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이십 년을 정신없이 살았다. 몇 번의 이혼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아들만 생각했다. 부부관계는 소원해져갔지만 시간이 흐르자 빚은 거의 다 청산이 되어 있었다. 앞으로 일 년 정도만 더 고생하면 끝이 날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는지도 몰랐다. 이제 거의 다 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여자는 그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마감을 하고 터덜터덜 걸어 집에 온 여자에게 열한시가 다 되도록 저녁을 챙겨먹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는 남편은 견디기 힘든 존재였다. 그날 여자는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며 자신도 일 다녀오면 힘들기는 마찬가지라고 쇳소리를 냈고 남편은 그럴 거면 일 때려치우라며 고함을 쳤다.
 
문득 십분 만에 밥을 먹는 게 버릇이 되었음에도 몸은 버티질 못해 자주 체했던 것이며 전단지를 돌리다 경비원에게 붙잡혀 면박을 당했던 순간들 가끔 월급이 늦어져 제때 카드빚을 막지 못해 가슴 졸여야 했던 날들의 기억이 여자의 속에서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그렇게 버티고 살아 왔는데도 자신에게 소리를 치는 남편이 서운했다. 여자는 더 이상 억지로 버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운함은 남편에 대한 오기로 변했고 다음 날 여자는 정말로 오년 넘게 다닌 마트를 그만뒀다. 얼마 뒤에는 점주로부터 퇴직금까지 받았다. 그렇지만 여자는 딱 한 달만 쉬자고 생각했다. 사실 전세재계약이 있는 해라서 벌이를 멈출 수는 없었다. 몇 년 사이 그들 부부의 벌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지만 전세보증금은 오백만원이나 더 올랐기 때문에 허리띠를 매고 또 매야 할 상황이었다.

연속극 재방송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쉼 없이 이어졌다. 이쪽 집안이나 저쪽 집안이나 사람만 바뀌었지 돈 때문에 울고 웃고 하는 모습은 다를 게 없었다. 무표정하게 식탁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여자는 문득 아들에게 몇 시에 들어오느냐고 문자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안방에 들어가 핸드백 속에 있는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 상단에는 문자메시지가 왔을 때처럼 어떤 아이콘들이 많이 떠 있었다. 여자는 그게 무엇인지 들여다봤지만 알지 못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것을 눌렀을 때 일전에 아들이 설치해 줬던 동창회 어플로 연결이 되었다. 동창회 어플은 고향 친구들의 소식이 올라오면 자동으로 여자에게 알림이 뜨게 설정되어 있었다. 여자가 잠깐 잊은 사이 고향 친구들은 그곳에 많은 글들을 남겨 놨었다. 누군가는 그날 먹은 식사 사진을 올리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자기 아이들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등산복을 입고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은 심심치 않게 올라왔다. 여자는 일전에 점주가 남편과 등산을 다닌다는 얘기를 했던 게 떠올랐다. 여자와 동갑인 점주는 벌써 몇 년 동안 전국의 산이란 산은 다 돌아다녀봤다며 등산만큼 좋은 취미생활이 없다고도 했었다. 여자의 남편도 등산을 좋아했지만 그것도 형편이 돼야 할 수 있는 취미였다. 주말이면 부부는 피차 쉬느라 바빴다. 하루라도 몸을 덜 움직이는 게 취미라면 그들 부부의 유일한 취미였다. 사진이 올라오면 친구들은 그 아래 댓글을 달아 놓곤 했다. 여자는 초점을 맞추기 위해 눈을 찌푸리며 그들이 올려놓은 글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다. 모두들 인생이 즐거워 보였다. 이후로 여자는 매일같이 동창회 어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순심이 일러주었던 날짜가 다가올수록 여자는 동창회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갔다.

*

여자가 일을 그만 둔지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그 보름 동안 여자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리고자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의 긴 시간을 채울 무엇인가가 여자에게는 없었다. 마냥 쉬고만 싶었던 여자의 생각과는 달리 쉬는 것은 생각 외로 괴로운 일이기까지 했다. 당장 이번 달에야 퇴직금으로 생활이 가능했지만 다음 달까지 직장을 새로 잡지 못하면 남편의 벌이로만 버텨야 했다. 그것만으로는 기한 내에 전세보증금을 마련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집안일을 마치고 나면 여자는 식탁의자에 앉아 앞으로의 계획을 궁리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 때문인지 며칠 전부터는 극심한 두통 때문에 하루 종일 약을 달고 지내게 되었다. 여자는 일을 안 하니 오히려 몸이 약해져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이미 예전부터 여자의 핸드백에는 파란색 솔루펜 한 갑이 늘 들어있었다. 여자의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과 남편은 저녁을 먹고 나면 각자 제자리에 돌아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나날을 보냈다. 남편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리모컨을 주물렀고 아들은 제 방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그럴 때면 여자는 안방에 들어가 그날 아침 집 앞 교차로 횡단보도에 나가서 챙겨온 생활정보지를 뒤적였다. 경력직에 대한 처우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고 일전에 다니던 유아복 매장보다 보수가 좋은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애초에 여자가 찾는 유아복이나 아동복 매장은 일자리가 거의 없어 여자의 선택권은 상당히 비좁았다.

순심에게서 다시 문자메시지가 온 것은 설거지를 마친 여자가 안방에 돌아와 생활정보지에서 봐둔 몇 군데 일자리를 두고 고민을 할 때였다. 동창회의 정확한 장소와 시간이 명시된 메시지는 참석여부를 묻고 있었다. 순심이 일러준 날짜가 당장 내일로 다가와 있었다. 여자는 남편에게 동창회 얘기를 꺼낼지 말지 고민했다. 남편은 고향 얘기를 하는 것을 싫어했다. 딴에는 고향 친구들 중에서 대학까지 나온 몇 안 되는 똑똑한 양반이었지만 빚더미에 눌려 별 볼일 없는 지금의 처지에 자존심을 상해할 법도 했다. 그렇지만 여자는 동창회가 꼭 가고 싶었다. 고향 친구들의 사진이 잠시나마 여자에게 옛 추억을 더듬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날의 모임은 앞으로 살아갈 또 다른 힘이 되어줄 것만 같았다. 여자를 알아봐주고 고생했다며 격려해줄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여자는 거실에 나가 남편에게 내일이 동창회라며 다녀와야겠다고 말했다. 남편은 여자를 한번 쳐다보더니 그러라고 대답한 뒤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옮겼다. 뭣 하러 그런 데를 가냐며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던 여자는 남편이 너무도 쉽게 허락하는 바람에 잠깐 멍하니 남편을 쳐다봤다. 안방에 돌아온 여자는 다음날 입을 옷가지를 챙겨놓고 일찍 침대에 몸을 뉘었다. 동창회 어플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며 이불 속에 웅크린 채 킬킬대던 여자는 금세 잠이 들었다.

이튿날 남편은 여자를 상무지구까지 태워다 주었다. 여덟시 시청 근처의 낙지한마당이라는 식당에서 모이게 되어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과 조수석에 앉은 여자는 차가 빛고을대로를 타고 상무지구에 접어들 때까지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는 진행자가 대둔산 케이블카에 대해 예찬을 늘어놓고 있었다. 마침내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여자는 내릴 채비를 했다. 차창너머로 보이는 식당 간판에는 거대한 낙지가 전골냄비 안에서 다리 하나를 치켜든 채 윙크를 하고 있었다. 여자가 외투를 걸치고 핸드백을 팔에 끼려는데 남편이 뭔가를 건넸다. 돈이었다. 단돈 얼마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라는 말이 희미한 얼룩처럼 따라붙었다. 여자는 남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돈을 받아서 나왔다. 오만 원짜리 넉 장이었다. 낙지한마당 입구를 향하는 여자의 등 뒤로 남편의 차는 곧 떠났다. 여자는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바람에 식당 입구를 빗겨서 바로 옆 빌딩에 들어갔다. 화장실 칸막이에 들어간 여자는 변기뚜껑을 내리고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 사이 순심에게서 몇 번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렇게 세 시간 남짓 화장실에 혼자 앉아 있던 여자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여자는 동창회 어플을 지웠다.

*

얼마 뒤 여자는 시내 지하상가의 한 숙녀복 가게에 취직했다. 이제 막 마흔 줄에 접어든 사모는 경험 많은 베테랑 선배님이 오셨다며 여자를 반겼다. 남편이 사업을 해서 번 돈으로 차린 매장이라고 했다. 오픈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아직은 손님이 적었다. 장사만큼은 여자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사모의 기대가 썩 부담스럽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일전에 다녔던 마트보다 보수가 조금 더 셌다. 여자가 유아복이나 아동복이 아닌 숙녀복 매장에까지 눈을 돌린 까닭이었다. 물론 공식적인 근무시간은 한 시간 더 붙었지만 전단지 돌리던 것까지 셈하면 마찬가지였다. 첫날 여자는 사모의 말대로 다른 점원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려 했다. 그러나 멀뚱히 서서 구경만 하는 것은 역시 여자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가게에는 여자 말고도 두 명의 젊은 여자 종업원이 있었는데 빠릿빠릿하긴 해도 고객응대 능력은 좀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모가 자신을 그렇게 반길 리가 없을 거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창고에서 상품을 꺼내 대강 다림질을 하고 진열하는 것을 돕던 여자는 곧 고객응대까지 해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종일 여자는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젊은 종업원들이 하는 일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처럼 일은 쉽지 않았다. 숙녀복은 유아복과 다르기도 했거니와 여자가 일하던 매장을 네 개쯤 붙여놓은 크기의 가게는 넓은 만큼이나 파는 제품의 가짓수도 훨씬 많았다. 여자는 고객응대를 하면서도 자꾸만 제품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 헤맸고 잠시만요…… 잠시만요…… 를 반복하다가 끝내는 젊은 여종업원들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했다. 아침에 사모가 베테랑 선배님이라고 했던 말이 자꾸만 귓전에 맴돌았다. 분명 이전 매장에서 여자는 베테랑이었다. 오히려 주인인 점주보다도 더욱 매장 사정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날 퇴근시간에 여자는 사모에게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했다. 사모는 첫날이니 당연한 걸 가지고 왜 그러시냐고 했지만 그 말은 오히려 여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여자는 자꾸만 실수를 했다. 가게 입구에 서서 젊은 여종업원들에게 고객을 인도하는 것이 겨우 해낼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어쩌다가 사모와 눈이 마주치면 초조함에 고개를 숙여버리고 말았다. 결국 여자는 가게를 그만 두었다.

여자가 마음속으로 정한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매일같이 생활정보지를 뒤적거리며 유아복 매장에 일자리가 나기만을 기다렸다. 이제는 보수가 어떻든 간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저 수년간 여자가 해왔던 일을 맡겨만 준다면 무조건 잘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유아복 매장은 자리가 나질 않았다. 그런 여자에게 남편은 그러기에 뭣 하러 잘 다니던 마트를 그만뒀냐며 면박을 줬다. 한동안 남편에 대한 미움이 한풀 꺾여 있었던 여자는 그 말을 듣고는 다시 오기가 발동했다.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하는 짓인데 속을 긁는 남편이 싫었다. 안 그래도 이쯤 되자 마트를 그만 둔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쪽은 여자였던 것이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여자가 원하는 자리는 나지 않았다. 그 사이 몇 번 다른 업종에 이력서를 내밀어봤지만 대개는 나이 때문인지 잘 받아주지도 않았다. 날이 거듭될수록 여자는 자신의 무능력을 실감하고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 딴에는 그래도 무언가 경력 같은 것을 쌓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나이만 먹어 왔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여자는 숙녀복 가게를 그만 둔 것조차 후회하게 되었다. 어쩌면 너무 자만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모의 베테랑 선배님이라는 말에 우쭐하지 않고 차근차근 일을 배워나갔더라면 지금쯤 시내 지하상가에서 일을 계속 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여자는 전보다 더 자주 솔루펜을 찾았고 저녁을 차려주는 것 외엔 남편과 눈길 한 번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여자가 그러나저러나 남편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리모컨만 주물렀으며 아들은 제 방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를 딸깍였다.
 
*

여자는 샤워를 하기 위해 물을 틀고 온도를 맞췄다. 물줄기에서 김이 나기 시작하자 옷을 벗어 세탁 바구니에 넣었다. 세면대 위에 걸린 거울에는 여자의 늘어진 젖가슴과 군데군데 튼 살이 여과 없이 비쳤다. 쓸데없이 불어버린 뱃살과는 대조적으로 움푹 꺼진 볼을 어느 중년의 여성이 쳐다보고 있었다. 염색한 머리 사이로 희끗희끗하게 흰머리가 보였다. 욕조에 떨어지는 물줄기는 빗소리와 함께 자욱한 김을 뿜어댔다. 곧 여자의 생기 없는 얼굴이 뿌옇게 지워졌다. 김 서린 거울 속 형체를 잃은 자신과 달리 선명하게 금이 간 타일이 문득 여자의 시선에 들어왔다. 분명 일전에 화장실 청소를 할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사선으로 패인 틈 안에는 이끼인지 곰팡이인지모를 검은 물체가 끼어있었다. 여자는 샤워를 하다말고 솔을 들고선 그 틈을 벅벅 닦아내기 시작했다. 세제를 뿌리고 한참을 문질러댔지만 타일의 겉면만 닦여질 뿐 틈 안쪽의 무엇을 지워내지는 못했다. 나체로 욕조에 쭈그려 앉아 솔질을 하고 있던 여자는 몸을 일으켜 다른 타일들을 살펴봤다. 낡아서 곧 떨어질 것 같은 타일도 보였고 욕실이며 세면대, 거울의 가장자리를 마감해놓은 실리콘도 파이거나 삭아 그 틈으로 벌써 물때가 끼어 있었다. 여자는 수건으로 물기만 대충 닦은 채 뒤뚱거리며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문지방과 끄트머리가 찢어져 콘크리트 재질이 드러난 벽이 바로 보였다.

장판은 온통 흠집투성이였고 벽지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여자는 문득 이 낡아빠진 집구석에서 빠져나가고 싶어졌다. 옷을 집어 입고 지갑을 챙겨 현관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집을 나선 여자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치매환자처럼 한참이나 멀뚱거리며 서 있던 여자는 생활정보지를 구하기 위해 횡단보도가 있는 교차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하루 종일 아무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어떤 날은 생활정보지를 구하지도 않고 잠만 자기도 했다.

그러나 반드시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여자가 마트를 그만 두고 딱 한 달이 되던 날 점주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아는 분이 백화점에서 유아복 매장을 운영하는데 이 분야에 경력이 있는 직원을 원한다며 혹시 일 할 생각이 있으면 연락해보라는 내용이었다. 여자는 메시지를 받고 곧장 점주가 적어준 연락처에 전화를 걸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의 백화점 매장 매니저는 근무 시간과 보수에 대해 간단히 얘기해주고 면접을 위해 찾아와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백화점이라 그런지 보수는 지하상가의 숙녀복 가게보다 조금 더 붙었다. 업무성과에 따라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월급을 오를 수도 있다고 했다. 여자는 문득 여태껏 이곳을 기다리느라 돌고 돌며 마음고생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보니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만 같았다. 당연하게도 백화점에서의 면접은 성공적이었다. 갑작스레 일을 관두고 나왔는데도 점주는 여자에 대해 좋은 말만 해 놓은 모양이었다. 새 매니저는 여자에게 백화점의 특성상 마트에 다닐 때보다 훨씬 더 고객응대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을 당부했다. 지난 십수 년 간 장사에 있어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였기에 그런 것은 별 걱정거리가 되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여자는 유니폼을 입고 백화점 유아복 매장에 출근했다. 백화점 로고가 새겨진 아크릴 이름표를 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자는 경력직에 속했기에 그쪽 용어로는 바로 둘째가 될 수 있었다. 이제야 그 간의 경력을 인정받는 것 같았다.

다시 직장을 잡게 되면서 여자는 눈에 띄게 밝아졌다. 퇴근 시간은 여덟시였지만 일주일에 한 번 시차인 날은 여섯시에 끝나기도 했다. 일찍 퇴근한 날은 물론이거니와 이제 여자는 여덟시가 넘어 집에 돌아와도 쇳소리를 내지 않고 남편에게 저녁을 차려주었다. 심지어 돈을 벌고 식구들에게 저녁식사를 챙겨줄 수 있다는 게 즐겁기까지 했다. 지난 한 달 동안 어쩌면 여자는 일상에 감사하는 법을 배운 것인지도 몰랐다. 인생이란 그렇게 별거 없는 거라고. 조금 힘이 들지라도 쉬는 것보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놓는 게 훨씬 속편한 일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빚을 모조리 갚아버리고 전세재계약까지 문제없이 처리되면 한 삼 년 안에는 이사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업무성과가 좋아서 월급이 오르면 가끔은 남편에게 등산용품을 사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저녁식사가 끝난 뒤 여자는 사과를 깎아 소파 앞 탁상 위에 놓았다.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며 접시에 놓인 사과를 집어 먹었고 곧 여자의 부름에 거실로 나온 아들도 포크로 사과를 하나 찍어 제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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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 다닌 지 일주일쯤 되자 여자는 웬만한 업무는 척척 해내게 되었다. 브랜드는 다르다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공통된 부분이 있었기에 상품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별 어려움이 없었고 고객응대도 생각보다 까다롭지 않았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백화점씩이나 오시는 분들이다 보니 확실히 교양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 적도 벌써 몇 번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업무상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가의 외제품들은 카탈로그가 온통 영어로만 되어 있어 여자로서는 읽을 수조차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여자는 카탈로그를 집에 챙겨가 아들에게 한글 발음을 적어달라고 했다. 정산을 위해 컴퓨터를 만지는 것도 여자에겐 버거운 일이었지만 배우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자는 무엇이든지 의욕적으로 했고 그렇다보니 전에 없던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그 주 토요일은 시차인 날이기도 했지만 여자의 생일이기도 했다. 만일 계속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허송세월하고 있었다면 나이 먹는 게 서러울 뿐인 생일이 될 뻔했다. 여자가 집에 도착해 미리 재워둔 불고기를 익히고 잡채를 하는 동안에 아들은 여자를 위한 케이크를 사왔다. 여자가 좋아하는 모카크림 케이크였다. 일용직 노동자인 남편도 일곱 시쯤 되자 흙 묻은 워커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자의 남편은 오자마자 땀에 절어있는 옷가지를 벗어 빨래 바구니에 담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세 식구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 케이크에 불을 켜기로 했다. 남편은 식탁에 앉자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틀었고 그렇게 식사는 시작되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텔레비전을 틀지 않았으면 어색할 지경이었다. 식사가 끝난 뒤 여자가 상을 치우자 아들은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내왔다. 케이크에 기다란 초가 다섯 개 꽂히고 다시 짧은 초가 두 개째 꽂힐 즈음 여자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자는 안방에 들어가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백화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여자는 자신의 생일을 뒤늦게 안 매니저가 축하라도 해줄 모양인가보다 했다. 휴대폰 너머로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 여자는 고객응대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활짝 웃는 모습으로 예 매니저님 하며 전화를 받았다.

얼마간 매니저의 말을 듣기만 하던 여자는 곧 안방 문을 닫고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까의 웃음기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예?…… 그러니까…… 제가 그렇게?…… 네…… 죄송합니…… 네…… 정말 죄송해요. 고객센터 클레임에 여자의 이름이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문득 여자의 머릿속에 자신의 이름표를 유심히 살펴보던 한 손님이 스쳤다. 고가의 외제 유모차를 끌고 왔던 그 손님은 여자에게 사은품인 순면 손수건을 하나 더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여자는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죄송하지만 다른 분들을 위해서 사은품은 한 개씩 밖에 못 드린다고 답했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여자에게 얼굴이 유난히 하얗고 예뻤던 그 손님은 눈웃음을 지으며 어쩔 수 없죠 라고 말했다. 곧 ‘불친절한 고객응대 및 폭언’이라는 제목으로 클레임이 접수되었고 여자가 퇴근한 뒤 백화점 관리인을 거쳐 매니저에게까지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매니저는 종종 이런 일이 있기는 하다면서 그렇지만 이 분야에 경력이 꽤 있는 여자가 그렇게밖에 응대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실망을 표했다. 여자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통화가 끝나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또다시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한꺼번에 밀려와 여자를 집어 삼켰다.

안방 문 너머로 여자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여자를 기다리며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들이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소거를 하고 여자의 통화를 듣고 있었던 남편은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마저 껐다. 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편은 말없이 식탁 쪽을 바라봤다. 식탁 위에는 모카크림 케이크의 가운데에 가지런히 초가 꽂혀 있었다. 그 아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문구가 적힌 타원형의 초콜릿이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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