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4월 26일은 청소년 시인 육우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11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그는 동성애자이자 크리스천으로써, 자신에게 쏟아지는 혐오를 견디다 못하여 동성애자 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 꼭 육우당 뿐만은 아니다. 다른 청소년들에 비해 동성애자 청소년의 자살 시도가 두 세배 가량 높고 전체 청소년 자실의 30%를 차지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Gibson, 1989)

실상 동성애자들은 일반인과 별반 다를 것도 없고, 민폐를 끼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회와 인터넷을 떠도는 부정확한 정보들이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성애가 에이즈를 일으킨다는 헛소문이 있다. 그러나 사실 에이즈는 동성이건 이성이건 콘돔 없이 보균자와 성관계를 가지면 걸리게 된다. (에이즈가 발견되던 초창기, 폐쇄적 게이 커뮤티니에서 에이즈가 유행했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동성애자들을 괴롭히는 가장 중요한 존재는 바로 보수 기독교계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동성애를 “악(惡)”으로 보며, 그 근거는 거의 대부분 그들의 신성한 성경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견강부회(牽强附會)란 말이 떠오를 정도로 억지에 가까운 논리들이다.

동성애를 악으로 묘사하는 성경의 첫 번째 이야기는 <창세기> 소돔과 고모라라고 한다. 남색(을 포함한 각종 악)에 물든 도시가 진노한 야훼의 유황불을 맞아 파괴되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꼭 동성애가 문제가 되어 벌을 받았는지는 의문점이 남는다. 도시에 의인이 남아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보내진 천사들에게 소돔 사람들이 “재미 좀 보려고” 덤벼든다(강간을 하려 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잠깐, 동성애가 나쁜 건가 강간이 더 나쁜 건가?

동성애를 금기시 하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아마 <레위기>일 것이다. 아니, 이 챕터는 금기의 챕터이다. 구약의 동성애에 대한 시각은 “여자와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역겨운 짓이다.”(레위 18:22) 이 문장은 동성애를 악으로 보는 기독교계의 중심 테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레위기>에서 금지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지고 그 틈이 벌어져 있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레위 11:7), 서로 다른 두 가지 옷감으로 만든 옷을 걸쳐서는 안 된다.(레위 19:19) 하지만 대한민국의 크리스천은 삼겹살을 아주 맛있게 먹으며 ‘면 60% 폴리에스테르 40%’으로 표기된 티셔츠를 잘도 멋 부려 입는다. 종종 이런 것으로 트집을 잡으면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까지다”(누가 16:16)라는 식으로 구약의 율법은 이제 무효하다고 하는데, 왜 동성애에 대한 금기도 무효화되지 않는가?

내가 커다란 교회에 다녀 보았을 때 느낀 인상은 타 종교나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통해 자신들은 구원받은 우월한 존재라는 것을 뽐내는 집단이라는 것이었다. 바리새인이 따로 없다고나 할까. 하지만 예수의 정신은 사랑과 평화와 용서에 있지 않던가? 드물기는 하지만 몇몇 교회들은 성소수자들의 안식처 역할을 자처하기도 한다.

흑인에 대한 편견, 여성에 대한 편견이 시대의 바람에 휩쓸려 사라졌듯이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도 사라져버리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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