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장유진 기자
1989년에 출간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지난해 번역된 『없음보다 적은Less than Nothing』(『헤겔 레스토랑』과 『라캉 카페』로 번역됨)에 이르기까지, 지젝은 지난 25년 간 매년 두세 권 이상의 책들을 내놓고 있다. 『이웃』이나 『예수는 괴물이다』 같은 공동 저술까지 포함하면 1백권이 훌쩍 넘을 것 같다. 입이 떡 벌어지는 다산성이 아닐 수 없다. 그 중에는 『믿음에 관하여』처럼 작은 책들도 있지만 원서로 1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대작도 섞여있다. 이런 저작들을 창과 방패로 삼아 그는 지난 한 세대 동안 세계를 지배해왔던 주류적 흐름,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 포스트모더니즘, 냉소주의, 다원주의적 일원론 등등에 맞서(서 어떤 가능성, 그의 최근 인터뷰집 제목대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지켜)왔다. 모든 저작들이 성공적이었달 순 없지만, 과감히 대세를 거스르는 그의 발언과 이론적, 이념적 개입들에 지적, 심정적 쾌감을 느낀 동료 지식인과 독자들이 많이 나타났고, 이제 이들이 지젝의 열렬하고 단단한 독자층을 이루게 됐다(특히 한국에서 그런 것 같다). “지식계의 록스타”라는 지젝의 별칭은 그가 이런 인기를 잘 활용해왔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젝은 자신의 저작을 크게 두 갈래로 나눠 내내 이중 전선—양동작전이라고 해야 할까—을 펴왔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9.11사태나 이라크 전쟁, 월스트리트 점령시위 등 국제정치적인 현안들에 긴급히 개입하고(가령 『실재의 사막』이나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 다른 한편으론 철학적, 이론적 이슈들을 도발적으로 제기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예컨대 구조주의 이래 죽은 개 취급을 받던 ‘주체’나 ‘보편성’, ‘진리’ 등의 개념을 복권시켰고(『까다로운 주체』, 『부정적인 것과 머물기』),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소생 불가능해 보였던 사유와 실천들에 새로운 독해 가능성과 생기를 불어넣었으며(『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지젝이 만난 레닌』, 『시차적 관점』), 바울과 기독교(『죽은 신을 위하여』)라는 다소 뜻밖의 논제를 들이밀어 ‘주체와 타자’라는 철학적 문제를 일상의 정치-신학적, 이데올로기적 사태들에 결부시켜볼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해설에서 시작해 플라톤 철학에서 독일관념론을 거쳐 현대철학 비판에 이르기까지, 또한 히치콕과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저잣거리의 농담과 음담패설을 거쳐 양자물리학과 뇌과학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한 소재들을 재치 있고 때로 심오하게 뒤집어 놓는 지젝의 박학다식과 지적 명민함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사실 그의 이념적 꾸준함과 놀라운 성실성이다. 앞에 것은 그의 책을 펼쳐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국제 지성계에 나타난 이래로 자신의 정신적 충실성(fidelity)—물론 우리는 그 충실성이 정확히 무엇을 겨냥하는지 말하기 어렵다. 정신분석이론(라캉)과 대위를 이뤄 전개되는 변증법(헤겔)과 유물론(마르크스)이라고 명명해본다고 한들 만족스러운 답이 되지는 않는다—을 견지해온 지젝의 ‘뚝심’은 별로 주목 받거나 평가받지 못했다. 알랭 바디우가 사건의 주체, 진리의 주체라고 불렀던 사도 바울처럼, 지젝도 현실(이라는 상징적이고 상상적인 구축물)에서는 불가능한 것, 그러나 단지 불가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상징적 구성물(현실)의 핵심(hard core)에 자리해 있어서 상징계를 균열시키고 마침내 무화시키는 심연이 되기도 하는 어떤 사건적 공백(the void)—라캉이라면 실재(the Real)라 불렀을 테고, 헤겔이라면 실체이자 주체라 불렀을 어떤 지점—을 향해 자신의 비판 담론들을 쉼 없이 쏟아 부었던 것 같다. 이러한 지적 투쟁의 여정은, 그에게 제기될 수 있는 많은 비판들(책 내용의 중복, 주장의 모호함, 논리적 불일치 등등)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인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의 외모나 지적 스타일이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인 것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말이다.

2008년 월스트리트 붕괴라고 명명된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영원히 번성할 것 같았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맹위가 갑작스레 꺾이면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가을(waning of capitalism)이 찾아왔다. 요컨대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상징계가 붕괴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적 대의제 정치를 대체할 정치적-경제적 대안이 위기의 틈새에 웅크린 채 영원히 암중모색만 거듭할 것처럼 보이는 동안, 지배적 세력과 주류적 이데올로기들은 오히려 더 뻔뻔스럽게 거짓을 늘어놓으며 노골적으로 부패해가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 자신이 현 상태에서 어떤 낙관적 비전을 그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교착상태는 여러모로 당혹스럽다. 권력과 자본이, 마치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alien)처럼 인간을—더 나아가 지구생태계와 생명체 전부를— 제압한 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이 소외와 수탈의 구조를 우리는 언제까지 ‘경제발전’이나 ‘진보’란 미명하에 용인해야 하는가. 게다가 그런 말이 부도수표가 된 마당에서까지 말이다. 지젝의 사유는 이러한 문제 상황에 어떤 타개책을 열어줄 수 있는가?

 지젝의 수다한 작업 전체를 관통하며 반복되고 변주되는 테마는 “큰 타자는 없다”는 라캉의 테제이다. 나는 그것이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과도 어느 정도 공명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큰 타자는 없다”는 우상파괴적인 계몽의 선언이나 니힐리즘의 도래를 예고하는 어두운 경고로 끝날 성격의 일이 아니다. 신이든 왕이든 큰 타자든, 그런 것들—주인기표들—이 이전에는 ‘실제로 있었기 때문에’ 힘을 발휘했던 것은 아니며, 이제 그런 것은 없다고 선언된다 한들 갑자기 허깨비가 꺼지듯 사라지지도 않는다(이데올로기는 단순한 허위의식이 아니다). 국가, 권력, 자본 등 우리시대의 주인기표들 혹은 욕망의 원인-대상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본래 있는 것과 없는 것, 존재와 비-존재(무)를 왔다갔다 하는 존재론적 양서류(amphibian)이며, 타자(Autre)란 그 두 세계, 아니 세계와 비(非)세계, 존재와 무 사이의 (불가능한) 문턱이거나 문지기일 뿐이다. 자본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욕망과 믿음에 의해 지탱되는 공동체의 소외된 힘일 뿐이겠지만, 문제는 그러한 욕망과 믿음, 소외와 매개의 구조적 불가피성에 있다. 다시 말해, ‘없이 있는’ 저 신학적 존재, ‘없는 것의 있음(부재의 현존이자 현존의 부재)’이라는 저 언어적 존재 없이는 인간이라는 기이한 동물도 없다는 것이다. 지젝의 용어로 바꾸자면, 인간은 모든 현존이 무화되는 부정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되지 못한다(개는 개로 태어나고 개로 죽는다. 개에게 개-되기는 문제도 아니고 과제도 아니다. 이와 달리, 자신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고, 그러한 본성(nature)의 상실을 타자를 향한 물음과 타자의 인정을 향한 욕망의 대답들로 대체한 인간이라는 ‘방황하는’ 동물에게 인간-되기는 일생을 따라다니는 문제이자 평생의 과제가 된다). 따라서 ‘큰 타자의 없음’이 선언된 이후 필요한 조치는 바로 그 타자의 자리, 없음과 있음의 (불가능한) 문턱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젝은 이를 ‘증상-되기’나 ‘부정적인 것과 더불어 머물기(tarrying with the negative)’라고 부른다.

신이나 왕이나 영웅, 또는 자본이나 테크놀로지로도, 심지어 민주주의나 정의나 다른 어떤 이름들로도 그 공백(타자의 우상과 구별되는 타자의 자리 자체)을 막으려들면 안 된다. 이것이 대상 없는 욕망, 우상 없는 열망, 혹은 욕망의 정화라 불릴만한 길이다. 자본이나 권력을 거세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연대와 공통성을 위한 새로운 실험의 터와 공부의 길을 내는 것! 한데 거기엔 여전히 문제가 버티고 있다. 타자의 자리는 무(無)와 같기 때문에 무를 가리키는 무언가—구성적 잉여로서의 기표—가 거기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타자의 자리를 식별할 수도 그것의 생동—그에 따른 주체의 욕망의 여정의 발동—을 기대할 수도 없다. 하여 남는 것은, 다시 한번 숱한 우상과 오류와 환상의 통과(traversing the fantasy)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베케트의 말처럼, 더 잘 실패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요점은 실패를 미리 상수로 고려하라는 조심스러운 충고가 아니다. ‘어떤 성공도 최종적이 아니며 어떤 실패는 치명적이지 않다. 주체의 용기가 셈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즉 주체의 지속과 (인간을 지탱하는 존재론적) 차이의 존속을 통해 인간-되기를 계속하려는 힘과 용기가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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