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연구가 정치ㆍ경제와 협의의 사회에 한정되어 연구됨으로 인해 역사학의 빈곤화가 초래되었다는 인식에 일부 동의하며, 역사 연구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는 견해에 찬성한다. 역사는 다원적인 구조와 거기에 편입된 다양한 인자들에 의해 쫌쫌히 채워져 있어야 한다. 필자는 대학원에서 과학사를 접하였다. 특히 고대인들의 시간에 대한 인식에 흥미를 가졌다. 장구한 경험에서 물리적인 패턴을 찾고자 하였던 노력과 인류의 정신사적인 사유관념은 시간이라는 질서 체계로 응집되어 나타난다. 

'시간의 지도: 달력'의 저자 E.G.리처즈는 "달력은 추상적인 물건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알고 보면 1주일(7일)이라는 한 사이클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를 갖추지 않았다. 이것은 다수인의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진 다분히 인위적이며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에서 출발하였다. 거기에 비해 좀 더 구체적인 1개월은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돌면서 생겨났고, 1년이라는 시간도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면서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우리 집 탁상 위에 세워져 있는 심플한 달력[양력]은 1개월을 28일에서 31일로 각각 편집되어 있다. 달이 지구를 돌 때 어떤 때는 28일 만에 돌고 또 다음 달은 31일 만에 돌지를 않는데도 말이다. 1년도 마찬가지이다. 2월에 28일이 있는 해가 있는가 하면[이 해는 1년이 365일], 29일이 있는 해[이 해는 366일]가 있다. 거기에 비해 하루인 24시간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물론 고대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돌면서 하루가 생겨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지구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도는 것은 마치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신뢰할만한 시간체계를 필요로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력을 만들었다. 달력은 달과 해의 움직임이 보여주는 정기적인 주기로 시간을 계산하려는 시도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정확한 시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달력이 마치 실제와 같다고 믿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발명품이었다. 벽에 걸려 있거나 탁상용 달력에는 하루 동안에 지나는 시간[시·분·초]의 흐름을 기록해 놓을 수가 없다. 이것은 시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시대에 각종 스마트한 전자식 시계는 시간의 사이클을 극소화시켜 우리들로 하여금 짧은 시간의 속도감에 대해 예민하게 감지하도록 하였다. 이제는 하루 24시간과 1시간 60분 그리고 1분에 60초라는 근대의 개발품도 뒤로하고 0.0001까지 찾아내는 놀라운 광경을 운동경기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 사이클에 따라 움직인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도 포함한다. 그리고 그 움직임의 결과는 생산력[기록·성과물]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산력을 얻고자 하다면 시간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근대 이전 권력자들이 달력 개혁에 집착한 이유나 근래에 노동 현장에서 근로시간(시간당 최소임금)에 대한 노사 간의 줄다리기의 관심사는 결국 시간에 맞춰져 있다. 이제 대충 짐작하였을 것이다. 인류는 지속적으로 시간에 도전하고 시간을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필자는 비록 짧은 지면이지만 기회가 된다면 전대 신문 '줄탁' 칼럼을 통해 근대 이전 동ㆍ서양에서 시간을 어떻게 발견하고 운용하였는지를 소개하려 한다. 다음 필자의 시간에는 먼저 동양의 시간부터 함께 다루어보고 싶다.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