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쉬멜로 이야기’라는 책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적극적으로 권하는 필독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마쉬멜로 한 개를 주고 한 시간 동안 먹지 않으면 한 개를 더 주는 실험을 했다. 30년 뒤 이 아이들을 추적한 결과 한 시간을 견뎌냈던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그렇지 않은 집단 보다 훨씬 큰 성공을 이루어냈다고 전했다. 하지만 문제는 성공이 행복과 같은 단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쉬멜로 실험은 ‘사회적’ 성공에 관한 것이지 행복이나 만족감에 대한 실험은 아니다. 당연한 구별이지만, 슬프게도 우리 사회에서 이 두 단어는 동의어로 인식된다. “행복하게 살아라(=열심히 공부하고 돈 벌어서 성공해라)”.

무서운 이야기를 하자면, 세상엔 무수히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같은 값을 대입한다고 항상 기대하는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다. 노력엔 성공이 반드시 뒤따르는 것도 아니며, 어느 정도 상관성을 지닌다는 경험적 후기들뿐이다. 장담하지 못하는, 사실상 존재 불분명한 ‘성공 신화’에 매료돼 소소한 행복은 낙오자의 변명거리로 비웃음의 대상이 돼버린 사회에 개탄하게 된다.

마쉬멜로 두 개를 먹는 게 한 개를 먹는 것보다 행복하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맛있게 하나 먹어 버리고 그 시간에 다른 일도 하고 커피 마시며 휴식도 취하고 여행도 하면 안될까? 마쉬멜로 하나를 더 먹기 위해 기다리는 고통의 한 시간, 그리고 한 시간 뒤엔 마쉬멜로 세 개를 먹기 위해 또 기다리고, 그것이 반복된다. 과연 마쉬멜로를 먹을 수는 있긴 한 걸까. 그 중간에 마쉬멜로가 썩을 수도 있고 뺏길 수도 있으며 더 맛있는 음식이 나올 수도 있다.  

사실 우리들은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있다. 오늘이 어제와 같았듯 내일도 오늘과 같을 거라고(오늘도 사지가 멀쩡한 채 아침 햇살을 맞이한 거에 감사를 드린다). 또 오늘 미룬 즐거움이 다시 올 거라고, 혹은 기다릴 거라고.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렇다고 현재의 행복 추구만이 전적으로 옳다고 하는 게 아니다. 지금 인내하고 노력해서 나중에 행복하게 살 거라고 그래서 행복을 유예할 수도 있다. 전적으로 선택의 문제이다. 하지만 ‘즐기는’ 과정이 수반되지 않은 인내와 노력은 삶을 불행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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