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장유진 기자
삽화=장유진 기자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힘이 어찌나 강렬한지, 책상과 의자에서 내 몸이 멀리 떨어져 나가는 듯한”,  “나의 영혼뿐 아니라 나를 나이게 만드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런 책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파묵O. Pamuk의 『새로운 인생』을 읽으면서, 만약 내 생에 그런 책이 있었다면-물론 아직 생의 후반이 남아있지만, 과연 그런 멋진 경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건 아마 푸코M. Foucault의 저작들이 아닐까 싶다. 학부시절부터 한권씩 사 모은 그의 책들은 어느새 서가 한켠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푸코의 저작이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각서라는 형식으로 그 기억들을 하나씩 불러 모아본다.

1.
한국 사회에서 ‘푸코의 시대’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었다면, 아마 그 시기는 90년대 중후반일 것이다. 여전히 <다현사>나 <청년사>, 혹은 <공산당선언> 정도가 ‘학회’의 세미나 커리로 채택되던 시절에, 푸코는 왠지 묘한, 범접하기 어려운, 하지만 치명적인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텍스트였다. 물론 『광기의 역사』는 아직 축약본 밖에 번역이 되지 않았고, 『말과 사물』의 번역은 도저히 읽어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한글이 영어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읽었던 흔치 않은 기회를 주었던 책으로 기억된다(지금은 새 번역판이 나왔음)-.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와 같은 후기 저작으로부터 푸코를 처음 접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물론, “이 책은 공간 · 언어 ·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라는 잊을 수 없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임상의학의 탄생』은 전기 푸코의 고고학적 기획을 엿볼 수 있는 그나마 읽을 만한 텍스트였다.

2.
푸코가 친숙하게 다가왔던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철학자, 사상가의 저작에 비해 그의 텍스트는 초심자라도 자신의 관심과 열정만 있다면 미끄럽게 들어갈 수 있는 틈새들을 보여줬기 때문이다(몇 안 되는 예외적 텍스트로 아마 맑스 정도가 떠오를 뿐이다. 들뢰즈의 『천의 고원』 역시 그런 점에서 친절한 텍스트이긴 하지만, 그래도 들뢰즈와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칸트, 니체, 그리고 카프카와 프루스트로 이어지는 그의 꼼꼼하고 치밀한 독해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한때 한국 사회에 유행했던 <탈주 교도>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2.1.
물론 그런 점에서 푸코도 예외는 아니다.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과 같은 전기 논의들(고고학)에 대한 이해 없이 계보학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두 기획의 접합/미끄러짐에 대한 치밀한 분석은 전문가들의 몫으로 남겨둬도 무방하다. 아마, 그런 작업은 푸코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푸코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자신의 모든 책들은 “자그마한 연장통”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권력제도를 단락시키거나 그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혹은 완전히 분쇄하기 위해서는 이 연장통의 뚜껑을 열고 마치 드라이버나 펜치를 찾듯이 거기서 어떤 문구, 어떤 관념, 어떤 분석을 찾아보면” 그만이다. 그런 점에서 90년대 쏟아져 나온 푸코의 방법론에 대한 개론서들 중 지금 읽을 만한 것은 거의 없다는 것도 기록해 두어야 할 것이다. 가끔씩 용케 이런 글들을 써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볼이 화끈거리는 경우도 많다.

3. 
여기에 최근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이 느릿하게나마 번역되면서 그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루트가 만들어졌다. 어찌 보면 한권 한권의 저작에 병적일 정도의 완벽성을 유지하고자 했던(그래서 저자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글이 때때로 무색하게 느껴지는) 그의 저자로서의 결벽 때문에, 저작들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사유의 전환점들, 도약들, 그 과정의 고민들을 강의록을 통해서나마 엿볼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물론 그는 생전에 그 저작들이 출판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의록은 항상 그의 저작들과 함께 읽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그의 강연이나 대담, 조각글들의 모음집인 Dits et ?crits까지 번역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번역을 무시하다 못해 멸시하는 한국 학계의 풍토에서(번역서 1권이 논문 1편만큼의 가치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런 두터운 책들이 번역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악조건 속에서 묵묵히 번역을 해주시는 분들께 일단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4.
광기의 문제에서 병원/임상의학으로, 그리고 서구 사회의 에피스테메에 대한 고고학적 고찰에서 다시 감옥으로, 그리고 19세기 서구 사회의 성, 즉 섹슈얼리티를 둘러싸고 새롭게 재편된 권력에 대한 계보학적 고찰에서, 서구인이 스스로를 욕망의 주체로 인식하게 된 방식을 도출해내기 위해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 그 ‘존재의 기술’을 추적해냈던 그의 마지막 기획까지 푸코는 끊임없이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갔다. 그는 사상가이자 동시에 역사가였다. 그가 역사적 대상에 직접 접근했던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우리 자신, 그리고 사상, 행동에 대한 성찰에 실질적인 내용을 부여하는 유일한 수단이자, 또 역사의 암묵적 가설에 자신도 모르게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러한 푸코의 기획이 그의 저작의 엄밀성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소 ‘지루한’ 논란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부르디외가 다소 모멸감을 담아 일컬은 “호모 아카데미쿠스”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삶을 영위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사료 선택의 자의성, 해석의 엄밀성 결여, 혹은 문헌학적 실수 같은 것은 하등의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5.
이제, 푸코의 후기 저작을 관통하는 ‘훈육’, ‘통치성’, ‘생-권력’, ‘생-정치’와 같은 몇몇 개념들은 불멸의 것이 되었다. 특히, “죽게 <하든가> 살게 <내버려두는> 낡은 권력에서 살게 <하든가> 죽음 속으로 <내모는> 권력으로의 전환이라는 명제는 근대 권력의 본질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의 하나로, 푸코 사후에도 많은 논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대표적으로 아감벤G. Agamben의 호모 사케르 연작은 푸코가 제시한 새로운 권력의 상에서 상대적으로 죽음 속으로 <내모는> 권력의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다는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한다. 또 네그리+하트는 최근의 저작 ??공통체??에서 근대 권력에 대한 푸코의 기획에 내포되어 있는 비극적 인식만을 강조하는 주류 해석들에 맞서, 푸코의 생-정치가 갖는 사건으로서의 측면, 즉 지배적인 정체성들과 규범들을 분쇄하고 힘과 자유 사이의 연결을 드러내며 그럼으로써 대안적 주체성을 생산하는 전복적 주체화 과정으로서의 성격을 전유하기도 한다. 이렇듯 푸코의 기획이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전유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푸코 사상이 갖는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푸코에 대한 개론서를 읽느니, 차라리 자신의 취향에 따라-그것이 광기이든, 아니면 병원, 인간과학, 감옥, 성(性)이든- 직접 푸코에 접속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6.
사람들은 계속 푸코를 읽을까. ‘비판’kritik이 그 가치를 상실하고, 학점이니, 영어 점수니 수치화된 지표만이 금과옥조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푸코의 저작들은 이제 서점의 구석으로 내몰려 먼지만 내려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한국 사회에서, 그의 역설적 문제제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푸코가 말한 것처럼 비판은 통치당하지 않으려는 기예techne, 즉 “자유를 향한 우리의 참을 수 없는 열망”에 형태를 부여해주는 노력이다. “인간은 숨을 잘 쉴 수 있도록 태어났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에 동의한다면, 숨을 잘 쉬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붕어빵을 찍어내는 기계는 계속 돌아가겠지만, 그 붕어빵들이 생각을 하기 시작할 때 그 메커니즘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가능성을 꿈꿀 수 있다. 푸코의 책이 그 전투 교본의 한 권이 되기를 바란다.

c.f. 
푸코에 대한 가장 권위적인 평전을 쓴 디디에 에리봉은 푸코의 삶을 요약하면서 그의 저들뢰즈의 표현 그대로 “예술작품으로서의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프랑스 최고의 학문적 권위를 갖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서, 또 거리의 투사로서 그는 실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삶을 마감하기 3개월 전 1984년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강연에서 짤막한 몇 마디로 강의를 마쳤다. "자, 이 분석 작업에서 여러분들에게 아직도 할 말이 많은데, 하지만, 너무 늦었군요. 고맙습니다."

다음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왠지 모를 <겨울 왕국>이 맹위를 떨치는-진정 메타포일까- 2014년 봄 한국 사회에서 그 전망은 여전히 미세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것처럼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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