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학부시절, 개강일에 스스로에게 목표했던 방학계획을 실천했는가를 묻기 전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청춘의 한 자락에 추억을 남겼는지 되돌아보곤 했다. 목표달성도 하지 못 하고 추억도 남기지 못한 채 덧없이 방학을 보낸 좌절감이 익숙한 것을 보면 딱히 건실하게 방학을 보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먼 길을 돌아가지만 조금씩 위로 향해 올라가는 나선처럼 그런 시간들이 모여 ‘오늘의 나’를 만든 것임에는 틀림없다. 지난 겨울, 대한민국도 방황하는 청춘인 우리만큼이나 참 먼 길을 돌아갔다. 하지만 분명히 위로 향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었다.

故 노무현 前 대통령의 ‘부림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변호인>이 천 만 관객을 돌파하였다. <변호인>이 외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무엇이 상식인지, 무엇이 정의인지 알고 있다. 30년 전에 상식적이고 정의롭다고 여긴 일이, 오늘날에는 비상식적이며 불의에 의한 공권력 남용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30년 전 일이 낯설지 않은 것은 아직 우리 사회에 비상식과 불의가 잔재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변호인>을 폄하하는 의견들이 동의 받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불의와 비상식을 타파하기 위한 움직임들이 여기저기에서 포착되고 있다.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한 20대에게 안녕들 하신지 물어본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을 기억할 것이다. 각 학교 교직원들이 대자보를 훼손하고, 학생들이 게시하는 경우 벌금을 내도록 하는 등 강경책을 폈지만 이 열풍은 ‘안녕들 하십니까 네트워크’를 구성하기에 이르렀고 전국의 대자보들이 책으로 엮여 출판을 앞두고 있다. 대자보 릴레이는 잘 살아보기 위해 외면했던 비상식과 불의를, 불편하지만 직시하게끔 하였고 그 성찰은 철도ㆍ의료민영화, 밀양송전탑에서 비상식적인 공권력이 어떻게 인권을 유린하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기업의 만행을 고발한 영화 <또 하나의 약속>도 빼놓을 수 없다. 존엄한 인간을 부품처럼 사용하고, 내구성이 다 되면 합의금을 쥐어주며 사퇴를 종용한다. 산재를 신청해도 받아지지 않을 테니 수술비를 메우려면 합의하라는 협박을 하는 것은 예사이다. <또 하나의 약속>이 개봉되자 삼성은 즉각 ‘보이지 않는 손’으로 영화관 상영을 막으려 했으나, 입소문을 타고 예매율 1위를 달성하는 등 선전했다.
또 기업에 의한 살인행위로 일컬어지는 ‘쌍용차 근로자 정리해고’가 무효라는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5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근로자들은 자신의 자리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법원은 쌍용차가 주장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과 정리해고의 근거가 된 ‘회계 법인의 보고서’, ‘회사가 정리해고를 회피하기 위한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조건적으로 기업의 손을 들어줬던 1심과 비교한다면 기적이라 할 만한 명판결이다.

1980년대, 그 때만 하더라도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아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로 치부됐다. 그들의 가족들은 바뀌지 않을 현실에 무모하게 저항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오늘날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심지어 지방자치단체의 장마저도 국민의 손으로 뽑는 것이 상식이 된 세상이 되었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역사의 물줄기는 도도하게 흐른다. 비록 지금은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비상식과 불의는 언젠가 역사의 물줄기 앞에 허물어질 것이다. 정의롭고 상식적인 대한민국을 만드는 주체는 역사의 동력인 20대, ‘우리들’이다.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인 관심을 보일 때, 대한민국은 분명 위로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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