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할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방학동안 한산했던 농생대 3호관 113호 강의실은 강연을 듣기 위한 40여명의 학생들로 붐볐다. 강단에 올라선 이는 교수도, 유명인도 아니었다. 여든을 훌쩍 넘기신 할머니다.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86)는 학생들에게 70년 전 기억을 담담히 털어놨다.

‘학교 보내주고 돈도 두둑하게 벌 수 있다’, ‘안 가면 가족들 감옥살이 시키겠다’는 일본인 선생의 꾐과 협박에 열네 살 소녀는 가족 몰래 나주역으로 향했다. 뒤늦게 딸을 찾으러 온 부모님을 피해 화물 창고에 숨어있다 기차에 몸을 싣던 기억을 떠올린 양 할머니는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모님과 울고불고 그런 난리가 없었어”라고 회상했다.

여수에서 띄운 연락선을 타고 일본 나고야에 도착한 소녀들을 기다리던 것은 돈도 학교도 아니었다. 미쓰비시 비행기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고도 뺨을 맞고 구둣발로 채였다. 그제야 양 할머니는 ‘아 내가 속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해방된 고향 땅으로 돌아와서도 할머니들의 고생은 계속됐다. 70년이 지나도 제대로 된 배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에 다녀왔단 이유로 가족이 등을 돌린 경우도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혼동한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 고생한 걸 해방되고 알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 나도 맞선보다 일본서 돈 벌고 왔다는 얘길 하자마자 질색하고 도망간 남자들도 있었어.”

양 할머니의 뒤를 이어 강단에 선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이국언 사무국장은 “국가도 언론도 포기한 근로정신대 문제를 광주와 시민들이 먼저 싸웠다”며 “앞으로 있을 미쓰비시와의 배상 관련 항소심도 반드시 이겨낼 것”고 말했다.

“이렇게 학생들이 내 이야길 들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너무 고마워.” 강연을 마치고 학생들 옆에 자리한 양 할머니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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