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민단체나 테니스클럽에 가보면 젊은이들을 거의 볼 수 없다. 취업을 위해 스펙 쌓기에 바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에 어깨가 축 늘어져있다. 그렇다고 현실에 굴복할 것인가? 필름을 내 용봉골 초년생으로 되돌려 본다. 대학에 합격한 나는 합격사실을 부모님께 알리지 못했다. 후배로부터 소식을 들은 형님이 돈을 빌려 입학금은 냈지만 입학식 날 휴학계를 내고 신입생 환영회가 열리는 대강당 앞을 지나고 있었다. 때마침 들려오는 음악과 함성소리가 내 가슴을 도리질하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은 나는 “그래! 나한테는 건강한 몸과 젊음이 있다. 까짓 것? 내손으로 해보자”고 다짐했다.

열심히 일하며 돈 벌던 어느 날이다. 집안 형편을 걱정한 형님의 “대학가지 말아라”는 말을 듣는 순간 “죽어도 좋다”고 자포자기 채 가출했다. 혼자 산길을 걷던 6월, 산딸기를 따 먹으며 산 정상에 선 순간 나는 기절할 뻔 했다. 큰 멧돼지가 5미터 앞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도망가려고 했지만 발은 떨어지지 않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서로를 쳐다보며 숨이 멎을 듯 긴장된 순간 멧돼지가 고개를 돌려 달아났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휴! 죽을 뻔 했네!”였다. 순간 내게 깨달음이 왔다. “삶에 대한 본능이 이성을 앞서는구나. 그렇다면 죽기로 살아보자!” 일주일 만에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내가 자살한 줄 알고 “강가와 철도, 저수지를 찾아 다녔다”고 하시며 우셨다. 큰 불효를 한 셈이다. 군 제대 후 나는 곧바로 공장에 들어가 용접을 하며 학비를 벌어 다시 1학년에 입학했다. 그 후 학자금과 용돈은 방학동안 공사판에서 번 돈으로 해결했다.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전국의 모든 대학이 민주화로 몸살을 앓던 시절 전남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전국의 모든 대학에서 전두환 측의 낌새를 채고 5월 14일 날 데모를 중단했지만 전남대학교는 오히려 가열차기만 했다. 광주의 비극이 시작된 5월 18일 오후 4시, 충장로에서 만난 지도교수의 “학생회 간부가 지금도 피하지 않고 뭐하느냐?”란 질책을 듣고 후배들과 함께 현장을 떠났다. 졸업할 무렵 대기업에 3차까지 합격한 나는 마지막 단계인 회사 기획실장 앞에 섰다. “광주항쟁 때 학생회 간부였네요?”라는 말을 들으며 두 명의 탈락자 속에 들어 여수의 한 사립학교에 취직했다. 인연이 질기긴 질기다.

교감승진을 위한 전형에서 압도적인 점수로 1위를 하고 교사들의 지지를 얻었다. 주위에서 타협하고 부당행위를 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전남대학교의 피는 속일 수 없었다. 그 후 부당한 세상에 굴복할 수 없다는 생각에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기 시작하며 여수에서 언론사를 창간하고 편집위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불의와 어려움에 굴하지 않음은 전남대인의 정신이다. 중국의 사상가 루쉰은 말했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후배 여러분! 희망이 안보입니까?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희망을 만드세요. 여러분 자신이 바로 여러분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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