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oaL 제공
옆 사람의 휴지를 내가 다 썼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에도 계속 눈물이 났다. 흥분이 가라앉자 집에 있는 ‘지펠’ 냉장고와 ‘하우젠’ 에어컨이 떠올랐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 본체에도 ‘삼성’ 마크가 선명하다. 삼성은 정말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있었다.

영화는 여고생 ‘윤미’가 학교에서 ‘진성 반도체’ 입사 면접을 보며 시작한다. 윤미네 가족은 ‘직원들이 불만이 없어 노조도 없는 좋은 회사에 붙었다’며 좋아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윤미는 백혈병 진단을 받는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비슷한 증상으로 아파도 좋은 회사 ‘진성’을 섣불리 의심할 수는 없다. 그 사람들에게는 일등 회사 때문에 그런 병에 걸렸다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일 뿐이다.

정작 ‘진성’은 그들의 가족인 직원들이 죽어나가도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태연했다. 영화 속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반복되는 기업의 ‘갑질’은 이제 익숙했다. 국민이 ‘발끈’해도 바뀌지 않자 ‘대기업이 다 그렇지 뭐…’하고 스스로 단념해 버릴 때도 있었다. 내성이 생기자 분노는 줄었다.

그런 필자에게 강원도 소녀 ‘윤미’는 우리가 왜 분노할 때 분노해야 하는지 일깨웠다. 갓 교복을 벗은 아이가 우리나라 최고 회사에 들어갔다고 좋아했던 모습은 내 형제, 내 친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백혈병에 걸린 윤미에게 “네 잘못인데 누굴 탓하냐”며 소모품 취급을 한 그 곳이 오늘날에도 제일 잘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딸의 억울한 죽음 이후 윤미 아빠 ‘상구(박철민)’는 거대한 바위에 수 년간 맨몸으로 부딪혔다. 그 과정은 길고 험했다. 딸이 병에 걸린 원인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고, 동료의 병문안도 못 가게 하는 회사에서 증인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법도 윤미의 편이 아니었다. 같은 처지의 환자들은 승산 없는 싸움을 포기하고 회사와 합의했다. 그래도 상구는 딸을 위해 멈추지 않았다. 결국 윤미는 진성 반도체에서 산재를 인정받은 첫 번째 직원이 됐다.

▲ 사진=oaL 제공

<또 하나의 약속>은 만들어지기 전부터 주변의 반대에 부딪혔다. 선뜻 나서는 투자자도 없어 클라우드 펀딩으로 국민들의 돈을 모아 만든 영화다. 현재는 상영관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곳곳에서 ‘이것이 삼성의 힘이다’라는 말이 들려왔다.

롯데시네마(서울대 입구)에서 지난달 21일 열렸던 시사회에서 “상영관 찾기가 힘들다”며 씁쓸해하던 김태윤 감독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외압보다 내압을 더 두려워했다. 우리 사회는 삼성이 힘을 쓰기 전에 먼저 자기검열을 하고 움츠린다는 것이다. 이는 ‘신발은 머리 위에 올라갈 수 없다’는 충분한 학습 덕이다. 때려도 대들지 않으니 그들에겐 참 좋은 세상이다.

영화에는 아주 신기한 멍게가 나온다. 한 곳에 정착해 편하게 살다보니 뇌가 없어지고 식물로 변한 멍게다. 희한하게도 멍게와 신발이 꼭 닮은 것 같다.
 

▲ 사진=충북대신문 제공

다음은 롯데시네마(서울대 입구)에서 지난달 21일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시사회가에서 김태윤 감독과 100여명의 관객들이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Q. ‘삼성 백혈병 노동자’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계기는.
A. 시사IN에 나온 백혈병 노동자의 승소과정을 다룬 기사를 읽고 감동 받았다. 그 날이 2011년 6월 23일이다. 그 날부터 두 달을 고민했다. 황유미 씨 아버님을 만나고 8개월 동안 자료조사와 인터뷰를 했다. 그 후 취재를 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제작하게 됐다. 작년 9월 부산영화제에서 처음 공개했다.

Q. ‘삼성’이다. 배우 섭외의 어려움은 없었나.
A. 스타 배우 섭외에 어려움을 겪었다. 뜻이 있던 배우를 섭외하던 중 배우 박철민 씨가 선뜻 나섰다. 오히려 배우들이 선택은 쉽게 했던 것 같다. 광고나 다음 작품 등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작품이 좋은데 안할 이유가 있겠나. 그리고 박철민 씨가 “난 원래 광고 안 들어와”라는 말을 하더라.
투자배급사에서 투자를 못 받아 클라우드펀딩을 이용해서 개인투자자를 모았다. 시민들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단체예매 단체관람 추천한다.

Q. 상영 준비 과정에서 삼성의 외압이 있었나.
A. 실제적 외압은 없었다. 대신 내압이 있었다. 주변에서 정말 많이 만류했다. ‘극장에 못걸릴 것이다’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처음에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엔 ‘그건 옳지 않다. 우리는 너무 겁이 많고 움츠려있다’고 생각했다. 자기검열에서 비롯된 편견을 깨고 싶었다. 이런 자기검열에서 발생하는 내압이 ‘그들’이 원하는 것 아니겠나.

Q. 취재하면서 인상 깊었던 점은.
A. 영화의 주인공인 황유미 씨 아버님과의 취재가 인상 깊었다. 중간에 기업과 합의했더라면 그렇게 밝은 모습을 보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Q. 제목이 <또 하나의 약속>인 이유는.
A. 원래는 <또 하나의 가족> 제목이었다. 취재 중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만나 서로 또 다른 가족이 되는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하지만 “특정 기업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냐”, “삼성의 PR문구인 ’또 하나의 가족 삼성‘이 떠올라 선입견이 생긴다”는 의견이 있어 제목을 변경했다.

Q. 영화에서 삼성 건물 앞에서 일어난 폭력 장면도 실제 있었던 일인가.
A. 영화의 흐름상 필요해 만든 장면이다. 영화는 ‘극’이다. 영화 ‘변호인’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Q, 영화의 ‘멍게’ 이야기는 어떻게 나왔나.
A. 멍게가 원래 동물이었는데 식물로 변하면서 뇌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설마 있나? 하하. 명게는 속초 취재 당시 황유미 씨 아버님과 먹었던 안주다.

Q. 상구(박철민)는 영화에서 사투리를 쓴다. 특별히 사투리를 쓴 이유가 있나.
A. 실제로 황유미 씨의 아버님이 강원도 사투리를 쓴다. 박철민 씨와의 이야기 끝에 사투리를 쓰기로했다. 우리나라 오지 강원도의 택시기사와 서울의 가장 세련된 회사를 효과적으로 대비시키기 위한 방법이다.

Q. 교익(이경영)은 실제 인물인가.
A. 실제 제보를 바탕으로 추가한 인물이다. 반도체 공장에서 몇 십 년을 일하다 결국 병으로 사망했지만 끝까지 증언을 하지 않았던 사람을 모티프로 했다.
다양한 인물을 표현하려 했다. 삼성은 악의 소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장을 터전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도 있고 회사편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Q. 영화를 촬영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A. 반도체 공장 씬처럼 특수장비가 필요한 장면이 있었는데 돈이 없어 힘들었다. 대신 하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4년 반의 계절 변화를 영화에서 보여줘야 했는데 비가 필요한 장면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도 했고 눈 올 때가 지났는데도 눈이 오기도 했다.

Q. 영화 ‘변호인’이나 이번 영화는 실화를 다뤄 사회적으로 많은 이슈가 됐다. 감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A. 어려운 질문이다. 모든 예술인은 광대라고 생각한다. 나의 책무는 영화를 열심히 잘 만드는 것이다. 이 영화도 내가 영화를 하기 때문에 만든 것이다. 어떤 내용을 다룰지는 만드는 사람 각자의 생각이고 책임이다. 사회적 책무보다는 개인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영화인이어서가 아니라 개인의 도덕에 달린 문제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데 영화로 인해 착하게 보일까 두렵기도 하다.

Q. ‘또 하나의 약속’은 김태윤 감독에게 어떤 의미인가.
A. 만드는 동안 행복했다. 가장 행복했던 영화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시는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는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 이런 영화 안 보고 행복한 영화만 보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 사진=oaL 제공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