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지르기와 탈주, 해방적 파국과 창조적 파괴 따위와 관련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포괄할 만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목이라는 이름으로 할당된 공간에 쓰윽쓰윽 펜 질을 했더니, 제법 그럴싸한 제목이 나왔다. 제목으로써 글은 파멸했지만 제목 자체는 글에서 해방되었고, 제목의 공간과 형태는 새롭게 창조되었다. 그랬다. 나는 이것을 말하고 싶었다.

때마침 전남대에서 이런 고민과 맞닿아 있는 퍼포먼스가 지난 12월 6일에 있었다. 아티스트 안나 리스폴리(Anna Rispoli)는 전남대 기숙사 600여 명의 학생들이 각자의 방에서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20여분동안 형광등을 켰다 껐다하는 작품을 통해, 도시가 대형화 되고 공동체의 의미가 사라지는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 형성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새로운 시도는 위의 사례처럼 주로 예술의 영역에서 시도되었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영역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기존의 작가들이 세심한 관찰과 사색, 여기에서 비롯된 상상력과 문장의 자유로운 구사를 통해 삶과 세계를 파고들었다면, 근래에는 글의 형식, 정확하게 문장의 형식을 파괴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를 들어 미국의 작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Jonathan Safran Foer)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는 소설에서 ‘
엄청나게 우울한
, 믿을 수 없을 만큼 외로운’(236쪽)처럼 줄을 그은 것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노출하거나, ‘모르겠어요. 문제는
인가요?’(283쪽)처럼 문장을 완성하지 않고 문구 사이사이에 큼직하게 공난을 두거나, ‘
그랬더라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르지.
’(299쪽)처럼 문장의 특정부분에 일부러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쳐 놓는 등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형태로 글의 형식을 과감히 파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시인이자 극작가인 김경주 역시 ‘밀어’라는 산문집에서 활자를 물 흐르듯 흐느적거리게 만들거나 번지게 하고,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같이 문구 사이에 긴 공간을 두거나, 문장들을 듬성듬성 자유롭게 배치하는 등 새로운 글의 형태를 선보였다.

예술과 문학이 전혀 다른 형태의 행위와 기교를 통해 이미 구축된 양식을 가로지르거나 상상의 지평을 확장시킨다면 그것은 현실에서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 하나의 예로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도를 넘은 ‘종북몰이’와 어처구니없는 ‘대선불복 프레임’을 우리는 어떻게 탈주할 수 있을까. 종(鐘)과 북(鼓)을 사랑하는 ‘종북당’을 만들거나, 정권퇴진을 반대하는 ‘정권퇴진당’을 만든다면? 우스운 시대에는 우스운 상상이 필요하다. 거대한 음모와 술수가 온 사회를 질식시킬 것처럼 무겁게 짓누를수록 쓰윽 가로질러 가야 한다. 굳이 거대한 담론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역시, 암흑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소한 관념들과 질서에 홈을 내며 잘라 지르거나, 유유히 휘감아 도는 물꼬가 필요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삶을 새롭게 기획하려는 상상력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고 틀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그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이 파괴를 부르더라도 주저할 필요는 없다. 파괴는 곧 창조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