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 전 연주회 관람을 갔다. 창작음악연주회라 기대에 걸맞게(!) 공연장 로비는 한산했다. 10분전이 되자 입장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안내도우미들이 공연장 입장을 독려했다. 자리에 앉아 프로그램을 읽으며 공연을 기다렸다. 공연 시간이 되었는데도 연주자들이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뒤에서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공연을 시작하지 않는걸까, 궁금해 하면서 몇 분이 흘렀다. 10여 분이 지난 후 공연을 함께 주관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시장님이 의기양양하게 입장하셨다. 시장님은 당신이 늦어 수많은 관객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미안함도 들지 않으신가보다.

잠시 뒤에 사회자가 무대에 오르더니 시장님의 인사말씀이 있다는 멘트를 하고, 시장님은 의례적인 인사말씀을 하신다. 당신 때문에 공연이 지연된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사과말씀도 없으시다. 말씀을 마치시고 로얄석에 앉으시더니 한 곡이 끝나자 급하게 나가신다. 운동경기장을 찾는 자치단체장들은 경기를 마칠 때까지 열심히 응원하시던데, 공연장을 찾으신 시장님은 창작음악을 들을 정도의 예술적 조회가 없으신가보다. 어쩌면 8시가 다 된 시간에도 바쁜 시정 일정 때문에 나가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어지간한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모두 예술단체를 운영한다. 예술대학 교수의 입장으로서 제자들의 취업문이 넓어진 것이니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그런데, 이런 예술단체가 주민이 주인이 아니라 자치단체장께서 주인이신 게 눈에 거슬린다. 자치단체장의 취향에 따라 예술단체 운영이 좌지우지되고 그분을 위한 공연이 많다보니 연주자들이 박봉에 너무 시달린다. 주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예술단체이지, 자치단체장의 주머니에서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예술계에는 후원자[patron]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가기 마련이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Bach)는 바이마르, 케텐, 라이프치히 등지의 궁중과 교회에서 일을 하면서 귀족과 교회를 위하여 그토록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19세기의 판소리 광대들은 대원군과 고종의 총애를 받을 정도로 급성장하면서 양반들의 입맛에 맞는 5마당을 제외한 <변강쇠타령>이나 <배비장전>과 같은 재미있는 소리를 스스로 버렸다. 음악은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예전에는 음악의 주된 후원자가 소수의 상류계급이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민이 주된 소비층이자 후원층이 되었다. 이런 사회맥락에서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예술단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예술단체의 운영진은 아직도 중세를 살고 있다. 그러니 시장님이 예술단체의 유일한 후원자라고 착각하면서 단체를 운영하는 것이다. 시장님의 일정에 맞춰 공연이 시작되고, 시장님이 공연 전에 인사말씀을 하셔야 되고, 시장님은 한 곡이 끝나면 다음 일정을 위해 나가시는 관례가 계속 되는 것이다.

음악회에는 룰이 있다. 음악이 연주되는 중간에는 공연장에 절대 못 들어오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다. 이 룰은 시장이건 대통령이건 상관없이 공연장을 찾는 모든 관객에게 적용되는 룰이다. 이 룰을 지키지 않는 몰상식한 관객은 공연장을 찾을 자격이 없다. 시장님, 늦게 오셨으면 제발 한 곡이 끝난 다음에 입장해 주세요.

사족; 내가 갔던 공연은 수도권의 한 공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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