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민주화의 '살아있는 역사'…우리 시대의 영원한 '대기자 김중배'

 
"그는 천관우와 같은 무기교보다/번득이는 기교와 함께/그의 시대감각은 눈부셨다//동아일보 시사평설은/밤이 깊어지면서/더욱 빛나는 별빛이 되었다//…지식인이란 이 세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김중배는/늘 내일을 기다린다"

고은 시인은 인물 연작시집 <만인보>에서 김중배 동문을 ‘늘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1957년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로 시작해 <동아일보> 편집국장, <한겨레> 대표이사 사장을 거친 후 <MBC> 대표이사 사장에 이르기까지. 김 동문은 기자의 삶 50년 동안 언론민주화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언론민주화의 ‘살아있는 역사’다. 그의 삶을 <대기자 김중배-신문기자 50년>(2009)과 여러 인터뷰 기사를 통해 엮었다.

메마른 광야에 불 지르던 그의 칼럼
“기자는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이다. 사회와 역사, 인류와 세계의 부름에 응답하려는 자세가 기자의 첫번째 조건이라고 본다.”

김 동문은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 기자상’을 충실히 실현했다. 그는 1980년대 초부터 1984년까지 토요일자 동아일보에 칼럼 ‘그게 그렇지요’를 쓰며 사회의 부름에 응답했다.

그 중에서 단연 손에 꼽히는 것은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 쓴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다.

“그 역리를 바로 잡으려면 우선 박종철, 그의 죽음이 우리 앞에 눈이 부시도록 조명되어야 한다. 사인은 거침없이 밝혀지고 사인을 죽이는 길이 열려야 한다…이제 거짓의 하늘은 사라져야 한다. 거짓의 땅도 파헤쳐야 한다. 나라의 중심도 권력 쪽에서 내려잡혀야 한다. 나라의 중심이 힘을 가진 자 쪽에 두어져서는 안 된다. 힘이 없는 민중 쪽에, 나라의 중심이 내려 잡혀야 한다.”

이 칼럼이 나간 뒤 이른바 넥타이 부대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김 동문의 칼럼은 1987년 6월 항쟁의 논리이자 무기였다.

토요일만 되면 동아일보 칼럼을 복사해 돌리는 구두닦이도 있었다. 김 동문은 친구를 통해 이 사실을 듣고 구두닦이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어봤더니 구두닦이는 “숨이 막혀서 그랬어요”라고 대답했다. 군사정권에 의해 질식할 정도의 언론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던 그 시절, 언론은 권력의 눈치를 보며 숨어 있었지만 김 동문의 칼럼은 늘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며 메마른 광야에 불을 질렀다.

그런 탓에 김 동문은 칼럼이 나가는 날이면 집에 일찍 들어가지 못했다. 일찍 퇴근했다가 까만 차가 와서 남기부로 데려간 뒤부터는 집에 맨 정신으로 들어가는게 두려워 하염없이 술을 마시기도 했다. 길현동 자택을 들어서는 골목길에서는 늘 취한 몸, 비스듬한 자세로 골목 안쪽을 힐끗 본 뒤 검은색 지프차가 없으면 안심하고 골목을 걸어 들어가 초인종을 눌렀다.

자본주의를 경계한 ‘김중배 선언’
1973년부터 16년간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봉직한 뒤 김 동문은 1990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취임한다.

1990년대는 신문의 정체성이 변화하는 시기이도 했다. 1987년 증권사의 호황이 절정에 달하자, 신문들은 곧 매일 주식 시세표를 게재했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는 전통적인 저널리즘 정신은 ‘신문장사’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김 동문은 이런 현실을 개탄하면서 1991년 편집국장을 퇴임한다.

“우리는 권력보다는 더 원천적이고 영구적인 도전의 세력에 맞서게 됐습니다…권력,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권력, 가장 강력한 권력은 자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독재권력은 우리가 경험했듯이 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자본의 압력은 당장에 거세되지 않을 것입니다.”

1991년 편집국장 퇴임식에서 했던 이 묵직한 발언은 훗날 후배들에게 ‘김중배 선언’이라고도 불러졌다. 그는 자본이라는 거대 권력이 언론 통제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했음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이래서는 안 된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후 1994년부터 참여연대,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시민단체 대표를 맡던 중 2011년, 김 동문은 MBC 문화방송 대표이사 사장직을 제의받았다. 처음에 그는 사장직을 수락하지 않았지만 이곳저곳으로부터 전화나 방문을 통한 요청과 압박이 들어왔고, 우여곡절 끝에 사장직을 수락했다. 이는 정권과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에게 한 푼의 빚을 지지 않고 MBC 사장으로 선임된 것으로, 선임과정부터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보장해줄 단초가 됐다.

“정당한 비평은 정당하게 하면 그 뿐, 다만 비평의 질이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이에 충분히 대응할 것.”
김 동문의 취임 직후 MBC에는 ‘미디어 비평’이라는 매체 전문비평 프로그램이 신설됐다. 거대 언론권력에 대한 비평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언론에 대한 비판을 주저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 동문은 과감하게 비평 프로그램을 편성했고, 언론인들은 남을 비판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도 더 강화했다.

2003년 2월, 돌연 김 동문은 스스로 MBC 사장직의 남은 임기 2년을 내던지고 다시 시민운동의 광장으로 나섰다. 사퇴 이유와 배경에 대해 김 동문이 언급한 적이 없어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파악할 수 없다.

“민주언론의 불길은 타오르고 있는가”
MBC 사장을 맡을 당시 김 동문의 나이는 60대 후반이었지만 60대 후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주량을 갖고 있었다. 그런 김 동문 자택에는 후배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 술판에서는 어린 후배들과 까마득한 선배들이 한데 모여 결론이 나지 않는 논전을 벌였다. 김 동문은 입사연도도, 직위도 따지지 않고 이사람 저사람 옆에 앉은 사람마다 마주봤다. 때로는 목소리 높여 주장하다가, 때로는 술기운을 빌려 뻗내는 후배들의 공격도 받다가 어느 순간 “나 이제 그만 자러 들어갈라네”하고는 씩 웃으며 사라졌다.

“술이 곧 미디어다! 과연 술에 취하면 막혔던 언로가 열리고, 털어 놓지 못했던 것들을 소통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글은 물론 술을 마실 때마저도 자유, 민주, 정의와 함께 숨 쉬던 김 동문은 2009년 2월 26일 <대기자 김중배-신문기자 50년> 출판기념회에서도 권력과 자본의 압박을 받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우려했다.
 

“이들(방송국에 들어온 대자본)은 방송의 소유구조가 바뀌면 기자들의 생각도 바뀐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싶다. 물론 이 제도를 막기 위한 저널리스트들의 영혼은 살아있다. 하지만 우리가 건너편을 향해 팔매질만을 할 게 아니라 우리에게도 팔매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언론의 불길은 타오르고 있는가.”

펜이 꺾이고 양심이 뜯기는 시절에도 “설령 입술은 떨려도 역사의 진실만은 떨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던 김 동문은 늘 기자로서의 역할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50년을 넘게 한국사회에서 진정한 언론인으로서 살았고, 살아가고 있다.

김중배 동문 ▲1953년 법학과 입학 ▲1973~1986.4 동아일보 논설위원 ▲1983 동아대상 ▲1990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사 ▲1991 민주언론상(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안종필 자유언론상, 자유언론상(서울외신기자클럽), 전국기자가 뽑은 올해의 인물(한국기자협회) ▲1993.6~1994.6 한겨레신문 대표이사 사장 ▲1994 한국언론학회 언론상(신문부문 본상) ▲1994.9~1999.2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 공동대표 ▲1997 용봉인 영예대상(전남대동창회) ▲1998.8~2001.2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1999.2~2001.2 참여연대 공동대표 ▲2001.2~2003.2 문화방송 대표이사 사장 ▲2004 언론광장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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