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껏 많은 그들을 보아왔고, 나 자신이 그들에 속에서 살아가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다른 그들을 만들어 그들을 자신과 구별 짓거나 적대시하기도 한다. 그들이 무엇이건 간에, 나란 존재에는 이미 수많은 그들이 나를 설명하는 정체성으로 새겨져 있다. 소규모 그룹부터 가족, 학교, 지역, 국가, 계급, 계층 등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느 순간 그들에 속해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들과 내가 완전한 등식관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들 속의 그들이 서로 일체가 되어 있는 것 역시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 안의 다양성을 무시하거나 그들 안의 모두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런 ‘그들’을 문제 삼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글은 ‘그들과 그들’ 사이에 있는 ‘과’에 주목하고자 한다. 문법상 ‘과’는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 조사에 불과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과’는 ‘그들’이라는 개념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지닌 그 무엇이다. ‘과’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있기에 그것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그것의 의미는 현저하게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들과 그들’, 여기서 그들이라는 말이 ‘보수와 진보’를 칭한다면 그들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별개의 ‘그들’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과 그들’이라는 문구가 ‘그들이 그들’이라고 바뀌는 순간 그들은 한통속 혹은 비슷한 속성을 지닌 ‘그들’이 된다. 단지 ‘과’가 ‘이’로 바뀌었을 뿐이지만 그 순간 의미는 전혀 다르게 전화한다. 일개 조사가 문구의 의미를 완전히 뒤엎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수많은 ‘조사들’은 ‘개인들’에 비유될 수 있다. 이들은 그저 글쓴이에 의해 ‘쓰여’ 지거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의해 ‘포박’ 당해진 존재에 불과할 수 있지만, 필자는 이들이 스스로 변화 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주체라고 가정한다. ‘과’라는 개인은 언제든 생각이나 행동을 비틀어 자신의 삶과 주변을 바꿀 수 있고 그런 ‘개인들’의 집합적인 힘은 사회를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변화하는 방식과 형태는 한계가 없다. 예를 들어 조사인 ‘과’가 꼭 글자라는 틀 안에서만 변하는 것은 아니다. ‘과’는 ‘=’ 나 ‘♡’처럼 도형이나 그림의 형태로도 변화할 수 있다. ‘그들과 그들’은 ‘그들이 그들’이라고 변할 수도 있지만 ‘그들=그들’ 그리고 ‘그들♡그들’로 변형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인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틀을 가로지르거나 벗어나는 형태로 사회에 보다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껏 그저 하나의 낱개에 불과하다고 외면되거나 망각되어진 이들의 숨소리와 몸짓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있어야만 하나의 문구와 선, 글과 면이 만들어 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바뀐다면 의미를 변형시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혀 다른 질서를 구성해 낼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만 한다. 이들이 자신을 가두고 억누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움직일 때 그리하여 그것을 깨부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조사들’을 응원한다. 이들이 부조리한 현실을 극복하여 자유롭게 발언하고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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