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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품에 안은 전남대인 57 - 故 합수 윤한봉(축산·71)한평생 민주화를 위한 거름이 되다
한별 기자  |  kity103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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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20  22:3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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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 제공  
 
올바른 5·18정신 알리며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쟁

합수 윤한봉. 똥과 오줌을 섞어 만든 거름이란 뜻의 ‘합수’란 호는 자신을 낮춰 민중과 함께 살고자 했던 故 윤한봉 동문의 삶이 가득 담겨있다.

대학시절 민주화 운동에 뛰어 든 윤 동문은, 미국으로 망명해 재미동포운동 토대마련에 힘썼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력했던 그는 2007년 지병으로 눈을 감았지만 올바른 5·18정신을 알리며 죽는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다.

소외된 이의 벗이 되어 살고자했던 윤한봉 동문의 삶을 회고록 <망명>과 5·18기념재단에서 발간한 <5·18의 기억과 역사> 책을 바탕으로 돌아보고자 한다.

“오늘부터 나는 싸운다”
그저 농촌에 들어가 양을 치며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윤 동문은 1971년 23살의 나이로 우리 대학 축산학과에 입학한다. 고등학교 때 줄곧 부모님의 속을 썩였던 그는 성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공부에 매진한다.  

윤 동문은 1972년에도 당시 문리대 뒤의 하숙방에서 어김없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밖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던 하숙생들이 윤 동문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한 것이다. 휴교령을 시작으로 의회는 폐쇄됐고, 헌법은 폐지됐다.

‘방에 들어와 보던 책을 볼펜으로 찍어블고 사전 찍어블고 벽에다 박치기하고 어떻게 화가 나는지. 아! 내가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오늘부터 나는 싸운다.’

박정희 정권의 모습은 윤 동문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욕구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그는 민주화 운동으로 뛰어들었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됐을 때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일원으로 우리 대학, 전북대 등 호남지역을 맡아 시위를 준비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시위를 하지도 못한 체 긴급조치 4호 발동으로 실패한다. 2심에서 15년 형을 선고 받았던 그였지만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출소한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그 해 4월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이 지목됐고, 구속된 8명이 사형을 당하게 된다. 당시 윤 동문은 “그 소리를 전해 듣고 얼마나 화가 나는지 거기서 일어나갖고 또 한번 맹세했는데, 내 한 목숨 다 바쳐서 이 놈의 독재정권, 학살정권하고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1979년 부마항쟁이 발발했고 윤 동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부마항쟁이 일어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인시장, 양동시장 등을 헤매고 다니며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과 이야기 했다. 그리고 광주 시민들에게 변화에 대한 갈망이 엄청나게 솟구쳐 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5·18민중항쟁을 예견했다. “전두환 일당이 확고한 군사정권 수립을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 이에 광주·전남지역에서 자연 발생적인 대규모 항쟁이 발발할 것이다”고 생각했던 그는 항쟁을 막을 방도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1980년 5월 15일 윤상원 열사 등이 모인 자리에서 대책을 세우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5월 17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기습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5·18민중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윤 동문은 절망했지만 대책은 없었다.

윤 동문은 민청학련 등으로 인해 몇 차례 구속전과가 있었으며, 5·18민중항쟁이 터지자마자 핵심주동인물로 지목되어 현상수배 됐다. 그는 19일 새벽 신군부의 기습으로 광주를 빠져나간다. 부끄러움에 다시 싸우자고 마음먹었지만 신군부가 길목을 막고 있어 광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결국 27일 도청 함락 소식을 들으며 은신처를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윤 동문의 도피생활은 시작됐다.

 칼을 문 도피생활
윤 동문은 도피를 하면서도 칼을 물고 생활했다. 급습당할 것을 염려하며 언제나 심장을 쑤시는 연습을 했다. 목욕하고 있을 때도 경찰이 들이닥칠 위험에 칼을 물고 씻었다. 이런 불안한 도피생활은 1년 여간 이어졌다.

‘한 놈이라도 죽이고 나도 죽는다.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는다. 그렇게 해서 광주 운동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난 뒤 그는 해외로 나가 망명투쟁을 할 것을 마음먹었다. “광주 운동권에 걱정만 끼치는 이 따위 기약 없는 도피생활을 언제까지 무작정 계속할 것인가. 좋다, 나가자”고 그는 결심했다.

1981년 4월 29일, 윤 동문은 망명 배에 올랐다. 6월 3일 미국에 도착하기까지 35일 간 매일 잣 세알, 멸치 하나, 마른 새우를 먹으며 철제 상자 속에서 정신력 하나로 버텨냈다. 그렇게 그는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1980년 5월 하순부터 몸에서 떼지 않고 가지고 다니던 칼들, 최악의 경우 한 사람이라도 죽이고 자살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던 그 칼들을 어두운 밤바다에 힘껏 던졌다.

1981년 미국 망명에 성공한 윤 동문은 살아있음에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이뤄내기 위해 미국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LA에서는 미주동포사회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인 민족학교를 설립했다. 5?18민중항쟁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기 위해 재미한청련, 한겨레를 결성해 재미동포운동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오월 정신 계승을 위해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후 1993년 윤 동문의 지명수배가 해제됐다. 미국망명 이후 12년 만에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가는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LA발 서울행 비행기를 탄 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13년 만에 간 망월동의 오월 영령들 앞에 무릎을 꿇고 “죽지 못하고 도망간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윤 동문은 귀국 후 1995년에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했고, 2001년에는 (사)들불열사기념사업회 설립을 주도해 오월정신의 실천에 힘썼다. 또한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강연, 올바른 오월정신 계승을 위한 운동을 계속해나갔다. 일부 오월 단체를 비판하기도 했다. 윤 동문은 “오월 항쟁을 자신들만 했던 것처럼 행세하며 항쟁의 주역이었던 시민들을 5월과 무관한 사람들로 무시했다. 뿐만 아니라 5월을 자신들의 개인적 명예와 채권과 이권으로 간주하는 처신을 계속해왔다”며 분노를 느꼈다. 이런 분노는 올바른 5·18정신 계승을 위한 ‘5·18기념재단’ 설립으로 이어졌다. 설립까지 많은 논쟁과 진통이 있었지만 1994년 말 5·18기념재단은 창립된다.

몸이 안 좋았던 그는 다시 새로운 수평선을 향해 달려갈 것을 희망했다. 하지만 지병인 폐기종으로 2007년 민주화의 거름이 되어 눈을 감았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지라도 5월 영령들과 지난 12년의 망명생활과 헌신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한청련, 한겨레 회원들을 생각하며 이겨나갈 것이다. 영원한 그리움의 바다와 속이야기를 나누어가며 이겨나갈 것이다.’

故 윤한봉 동문은 ▲1971년 축산학과 입학 ▲1974년 민청학련 사건 피체 ▲1979년 현대문화연구소 설립 ▲1980년 5·18민중항쟁 관련 핵심 주동 인ㅁ눌, 내란 음모죄로 지명 수배 ▲1981년 미국정치망명 신청 ▲1984년 재미한청련 결성 ▲1995년 민족미래연구소 설립 ▲2007년 폐기종 투병 중 영면, 국민훈장 동백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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