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25년, 20여 차례 특종상…"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인생의 주인공이 돼라"

 

“기회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회는 만드는 것이다.”

기회, 절실했다. ‘지역대 가운데서도 전남대’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이 걸을 때 뛰었다. 잠을 줄였고 무거운 돌을 먼저 들었다. 1990년 <경향신문> 입사 후 박래용 동문에게 쉼표는 없었다. 검·경찰 출입기자를 시작으로, 월남 참전용사 고엽제 후유증’ 국내 최초 보도, ‘지존파 단독 인터뷰’ 등 수십 차례 특종을 냈으며 2008년 촛불정국 때는 ‘촛불 총책’으로 보도에 앞장섰다. 이후 한국의 위키리크스인 ‘경향리크스’를 주도해 시작했고 현재는 정치부장으로 누구 보다 바쁜 시계 속에 살고 있다.

“매일 성적표를 받는 직업이 기자다. 특종하면 A지만 놓치면 F다. 그럼에도 다시 태어나도 기자가 되겠다”라고 말하던 박 동문. 그를 <경향신문> 편집국에서 만났다.

사각사각, 원고지에 기사 쓰던 시절
“있어 보였다.”

1980년, 대학에 막 입학한 박 동문에게 <전대신문>은 왠지 달라보였다. 형의 권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원 시험을 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5·18로 한 학기 동안 발행이 중지 됐다가 2학기부터 재발행 됐지만 학교의 편집권 침해 등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꿋꿋이 신문을 만들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전대신문>의 역할이 크다. 기사 쓰는 법 등 기초적인 것들을 배웠던 시간이다.”

박 동문이 기자가 된 이유도 학보사 시절의 영향이 크다. 그는 “기사 쓸 때 원고지 위로 사각거리는 펜의 감촉을 좋아했다”며 “그 감촉이 좋아 기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는 가끔 문구점에 들러 대학시절 썼던 그 펜을 사곤 한다.

꿈이 생기고 목표가 보이다
“3학년 2학기 불어 받아쓰기 시험에서 교수가 자꾸 ‘virgule’를 말하셔서 당연히 주인공 이름인 줄 알고 답안을 써냈다. 알고 보니 ‘virgule’는 쉼표를 뜻했다. 쉼표를 주인공인 줄 알았던 나를 보고 교수가 얼마나 한심했겠나.”(웃음)

박 동문은 졸업반이 될 때까지 학업은 뒷전이었다. 하지만 기자라는 꿈을 이루기로 마음 먹은 뒤에는 졸업을 해야 했고 공부를 해야 했다. ‘빵꾸 학점’을 채우기 위해 4학년 내내 동분서주 했고 졸업 후에는 도서관 별관(백도)에서 살며 언론고시에 매진했다. 아침 일찍 도시락 2개를 싸들고 가 저녁 11시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과 달리 나무가 우거지지 않았던 관현로(정문)를 걸으며 땡볕 아래 탈진 상태가 되기도 했고 어떤 날은 공부가 잘 돼 머리가 꽉 찬 기분을 느끼며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심에 빠졌던 적도 많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수능에는 국,영,수가 기본이듯 언론고시의 기본이 되는 논술, 한자, 영어 등을 필수적으로 준비했다. 토익 문법서 한권을 15분 만에 볼 정도로 실력을 쌓았다.

“면접에서 질문조차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당시 원로들에게 과격한 이미지였던 우리 대학은 핸디캡이었다. 이를 극복하려면 1차는 수석합격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1차 필기시험은 가뿐히 통과할 수 있도록 공부했다.”

쉽지 않았다. 필기시험의 달인이 되기까지 2년이 걸렸다. 그는 1차가 필기시험인 신문사는 모두 원서를 넣었다. 그는 “실력이 쌓이자 20~30명 되는 면접 인원에 늘 뽑히게 됐다. 다른 사람들도 다 면접장에서 봤던 얼굴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드디어 연령제한 마지막 해 마지막 시험을 봤던 <경향신문>에 합격한다. 9회말 2아웃의 상황에서 역전승을 거둔 것이다.

비 오기 전에 준비하라
입사 후 박 동문의 각오는 남달랐다. 잠조차 부족한 수습기자 생활에도 일주일에 책 한 권을 읽었고 ‘무거운 것을 먼저 들자’라는 굳은 각오 아래 일이 생기면 “제가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 퇴근은 집이 아닌 자신의 출입처인 강남 경찰서로 갔다. 가서 무조건 형사들과 안면을 틔우고 친해졌다.

“뭐든 비가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한다. 통닭을 사들고 가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120%의 노력을 해도 사회생활은 힘들다. 제자리에 있기도 벅찬데 노력하지 않으면 떠내려 간다.”

박 동문의 이러한 성실함은 그에게 결정적인 홈런을 날릴 기회를 줬다. 바로 지존파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지존파 일당 7명이 1993년, 1994년 9월까지 5명을 연쇄 살인한 사건인데 이때 그는 행동대장 김현양의 단독 인터뷰를 따냈다. 그는 경찰이 영광에서 지존파 사건 현장검증을 끝내고 잠시 쉬는 틈을 타 지존파 일당이 타고 있던 호송차에 올랐다. 형사들이 당장에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는 형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척 하며 상황을 살폈다. 이때 호송차에 타고 있던 형사반장이 평소 통닭을 사들고 가 만나던 친한 이였다. “박기자 특종하겠네”, 형사반장의 암묵적인 허락이 내려졌다.

잠시 후 그는 김현양의 옆자리로 가 질문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수첩은 꺼내지 않았다. ‘사회냉대, 인육, 살인…’ 단어를 중심으로 외웠다. 3시간의 대화 후 호송차에서 내려 눈을 감고 생각나는 대로 기사를 썼다. 특종 중의 특종이었다.

“자신의 실력만 분명하면 어떤 핸디캡을 갖고 있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

달리고 달리고, 24년간 한결같이
오전 9시 출근, 10시 회의, 11시-12시 기사 배정, 오후 1시 점심, 2시 회의, 3시 지면 확정, 5시 마감, 7시 기사 재배치, 8시-10시 인쇄, 이후 마감 회의, 12시 퇴근. 박 동문의 하루다. 점심은 대게 김밥 한 줄이 전부일 정도로 그의 하루는 빡빡하다. 일주일에 한번,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일요일 전날인 토요일만 잠시 쉰다.

박 동문은 다시 태어나도 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글을 쓰고 그 글이 변화를 불러올 때 정말 행복하다”고 말했다. 92년 월남참전 용사 후유증 기사로 법제도가 만들어졌고, 2008년 촛불정국  당시 하루 2시간을 자고 링걸을 맞으며 신문을 만들었으며 2011년 디지털뉴스팀 편집장일 때 최초로 한국판 위키리크스인 경향리크스(철저한 익명 보장의 기사 제보 시스템)를 만들어 전두환 양주파티, 인지대 도둑 등을 보도해 사회에 반향을 일으켰다. 또 경향닷컴(인터넷판)과 경향신문을 통합해 온·오프통합형저널리즘을 만드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누구보다 앞서서 변화를 이끌어 나가는 핵심 인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이 ‘그때 할 걸’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후회는 돌이킬 수 없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라.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잘할 수 있고 종국에는 행복하다. 마지못해 하는 일은 불행할 뿐이다. 인생에서 조연이 되지 말고 주인공이 되라.”

박래용 동문 1990년 <경향신문> 입사(공채29기) ▲1990~1998년 사회부 경찰.법조 출입 ▲‘월남 참전용사 고엽제 후유증’ 국내 최초 보도. ‘장학로 계좌에 뭉칫돈 수시 입금’, ‘김현철 대선잔금 300억 은닉’ ‘서울대 총장 딸도 고액과외’ 특종.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 총 4회 수상 ▲‘지존파’ 단독 인터뷰 등 특종상 20여회 수상 ▲법조반장·시경캡(사건팀장) ▲1998년 <당신, 검사 맞아> 발간 ▲1999~2005년 정치부 기자 ▲여당 반장·노무현 정부 청와대 출입기자  ▲2006년 미국 듀크대 저널리즘 연수 ▲2007년 전국부장 겸 대선후보 검증 특별취재팀장. ‘이명박 처남 김재정 전국에 땅 224만㎡’ 특종  ▲2008~2009년 사회부장. 촛불시위 보도 ▲2010년 논설위원 ▲2011~2012년 온라인 편집장. 국내 최초 온오프 통합저널리즘 도입. 경향대상 수상 ▲2013년 정치에디터 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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