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불화와 마주한다. 굳이 내가 겪지 않더라도 “남자친구와 싸웠다”, “직장동료와 사이가 안 좋다”, “고부갈등이 심각하다” 는 식의 이야기를 주변 지인으로부터 듣기도 하고, ‘그들’ 혹은 특정한 이념이나 사상이 지배적인 관념과 불화하는 모습을 뉴스를 통해 접하기도 한다. 불화는 도처에 널려있고, 그 누군가의 불화는 언제든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며, 때로는 나 자신이 불화를 야기 시킬 수도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불화의 혐의를 지니거나 공모할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용의자일지 모른다. ‘내’가 ‘세상’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한 불화를 빗겨갈 수 없다면, 우리는 이것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자크 랑시에르는 “불화란 계쟁(係爭)적인 공통의 대상들을 그것들을 ‘보지 않는’자들에게 부과하는 논쟁적인 공통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지배 공간에서 말로 인정되지 않고 그저 고통이나 분노의 소음으로 간주되던 말들을 그 지배공간에서 듣게 만든다.” 라고 말한다. 불화는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그리고 시민들이 국가에게 거부된 존재들과 상황들을 명명하는, 어떤 말을 듣거나 듣지 않는 방식에 쏘아붙이는, 내가 하는 말은 소음이 아니라고 상대에게 제기하는 몸부림이자, 서로 다른 문제의식과 전략들이 외화 되는 하나의 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그들의 말들을 지배공간에서 듣게 되고, 그 다음에는?

보통의 경우 불화는 비극적이라기보다 희극적으로 끝이 난다. 서로가 생각하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계선’을 넘지 않는 한 불화는 이해되고 포용되며 치유된다. 사람들은 불화가 만들어낸 공간에서의 언어와 몸짓을 통해, 존재했으나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인식하고 현실을 재번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지배적인 세력은 불화에 폭력적으로 대응한다. 특히 약자에 의해 야기된 불화는 대부분 지배세력에 의해 무시되거나 왜곡·과장되고, 욕설과 매질, 연행과 구속, 해고와 살인, 손해배상 청구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이거나, 심지어 폭력적인 절연과 절단을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불화해왔다. 비극적 결말이 만들어낸 단절과 배제조차도 자신을 점검하고 문제를 재검토하는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화를 통해 소통해왔고 소통하면서 불화해왔으며 그것을 통해 변화해 왔다. 따라서 불화와 마주 했을 때 그것을 두려할 필요도, 불에 대인 듯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다. 다만 그것의 내용을 알아듣고자 노력해야 하고 알아들을 줄 알아야 한다. 사실 모든 불화는 말하지 않았거나 듣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 아닌가. 따라서 불화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은 무시되거나, 어디에 쳐 넣어지거나, 매장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다뤄지고 뜨겁게 논쟁되어져야 한다. 결핍 혹은 부조화 그로 인해 금이 가거나 갈라진 곳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보수하거나 재건축함으로써 언제든 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관계를 떠받치는 것은 바로 이 끝없는 소통 작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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