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받지 못하는 여성농민 중요성 일깨워…“학생은 늘 역사 속에 있어야 한다”

오미란 동문은 키도 작았고 체구도 왜소했다. 연약해보였다. 하지만 그가 쏟아내는 말들은 단단했다.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됐어도 나약해지기 보다는 국가보안법에 의문을 품었다. 농민운동에 참여해 여성농민운동이 필요하다고 깨달은 후, 여성농민을 교육하는데 스스로 나섰다. 그는 “그것이 청년학도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민주화는 청년학도의 ‘사명’
오 동문이 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대학 입학 후 흥사단 아카데미에 참여해 활동하던 중, 박관현 열사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옥중 단식 끝에 사망한 박 열사나 학내에서 경찰에 붙잡혀 끌려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강한 인상을 받은 그는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5월을 늘 길바닥에서 보냈다. 경찰들이 학교에 상주하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민주화에 기여하는 것이야말로 청년학도의 사명이라 생각했다.”

학생운동에 열중하던 오 동문이었기에, 당연히 대학공부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학과장이 그를 불러 “학생운동을 하는 것도 좋으나, 학생이라면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나”는 말을 전했다. 하지만 “민주화 기여=청년의 사명”이라는 오 동문의 생각은 변치 않았고 학생운동을 향한 열망 역시 꺼지지 않았다.

1985년에는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인해 구속돼는 일도 발생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오 동문은 구속보다는 주위 사람이 받은 상처로 인해 더 가슴 아팠다. 국가정보원은 농사를 짓고 있던 오 동문의 엄마에게 찾아가 “딸을 가난하게 키워서 딸이 붉은 사상에 물들었다”며 협박했다. 이때부터 오 동문은 “이런 식의 국가보안법이라면 당장에 폐지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말 국가의 안보를 위협했나? 이적행위란 것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선량한 사람들에게 못을 박는 것이 국가보안법이라면 존립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여성농민을 교육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겪었던 5·18 민중항쟁이 더 크게 확산되지 못했던 데에는 “지역전선운동의 약화”때문이라고 생각한 오 동문은 “농민운동을 강화 시키겠다”는 결심을 한다. 하지만 시골에 내려가 보니, 농민운동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여성농민운동’이었다.

“쌀을 제외하고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먹거리는 여성농민의 손을 통해 나온다. 여성농민이 없다면 농업이 지속될 수 없을 만큼 여성농민의 역할이 크다. 하지만 농가의 대표 자리는 남편이나 아들일 뿐, 절대 여성농민에게 내주지 않는다. 여성농민은 일할 권리만 있을 뿐, 사회적 권리를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농민운동에서조차 여성농민은 주목받지 못했고, 그 누구도 여성농민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오 동문은 1989년, 농촌봉사활동(농활)과 결합해 여성농민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마을마다 꾸려진 부녀회와 함께 마을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교육했다. 어두운 밤길을 따라 3,40분을 족히 걸어가야 했지만 무서움도 없었다. 그저 여성농민은 어떤 존재인가? 여성농민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등의 질문을 통해 여성농민 스스로가 자신들의 주체성, 자존감을 발견하도록 했다.

“20대 후반의 어린 나이였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역사를 바꾸고 삶을 바꾸는 과정에서 반드시 여성농민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전남여성농우회 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우리 대학 대강당 옆에서 발대식을 했다. 800여명에 가까운 여성들이 모여 무언가를 조직한 것은 전국 최초였기에 이날의 발대식은 전국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1997년에는 전남여성농민회 정책실장을 맡게 된다. 그때도 “아무도 여성농민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누군가가 여성농민 정책을 연구하길 바라는데,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직접 해 보면 어떻겠냐”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대학원에 진학한 뒤, 본격적으로 여성농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국가에서도 조금씩 여성농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뿐, 깊은 관심은 없었다. 여성부(현재 여성가족부)에서는 여성노동자에만 관심을 둘 뿐, 여성농민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농림부(현재 농림축산식품부)도 다문화여성에게만 관심 있었다.

“이 땅의 마지막 천민은 여성농민이 아닐까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 누구도 여성농민을 인정해주지 않았을 뿐더러 관심도 없었다.”

오 동문은 더 열심히 여성농민 연구를 수행했다. 농림부의 여성농업인 5개년 계획 등을 수립하는 연구를 맡기도 하고, 여성농업인 육성 조례를 만드는데도 함께했다. 2009년에는 여성정책연구기간인 전남여성플라자가 생기면서 여성가족부에서 여성농민관련 사업을 만들어내고 창업지원을 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이후 2011년, 그는 광주여성재단이 설립되면서 “연구, 행정, 현장경험이 바탕이 되기 때문에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아들여 현재까지 광주여성재단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오 동문은 광주여성재단이 해야 할 가장 첫번째 일로 “지역전체의 양성평등 향상”을 꼽았다. 광주는 민주화의식이 굉장히 높은 지역인 반면, 양성평등 의식은 오히려 약하다. 특히 광주는 대학졸업자 여성의 비율이 타지에 비해 5%나 높은데 여성이 맡을 수 있는 일거리 영역은 취약하다. 그렇기에 그는 “광주의 특성에 맞는 여성의 일자리를 찾아내는 것이 숙제다”고 말했다.

“역사 속에 있길 바란다”
“여성농민분야에서 만큼은 전국 최고의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박사나 교수가 아니더라도 한 분야를 개척하고, 그 분야에 대한 신념을 가지면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나 자신이 브랜드다.”

하지만 오 동문은 패기 없는 지금의 대학생들을 우려했다. 그는 사회학과에서 조교와 비정규교수로 일하면서 “학생들은 단거리 마라톤만 달리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학생들을 볼 때마다 오 동문은 미래사회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그의 대학시절에 비하면 요즘의 대학생들은 문화에 대해서는 훨씬 진보적이지만 비판적 지성이 사라졌고, 자신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상당히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했고, 취업에 대한 어려움이 커졌기 때문에 대학생들의 모습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더라도 청년의 임무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년이 사회에 무관심하면, 그들이 중장년층이 된 미래사회에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나. 지성비판이 사라진 미래사회가 두렵다. 더 멀리 보고, 사회에 할 말이 있다면 말해야 한다. 청년들은 늘 역사 속에 있어야 한다.”

오미란 동문은 ▲1982 전남대 일어일문학과 입학 ▲1991~1994 전남여성농민회 정책실장 홍보부장 ▲1995~1996 전남여성농민회 사무국장 ▲1997-2001 전남여성농민회 정책실장 ▲2001 전남대 사회학과 대학원 입학 ▲2009~2010.3 전남여성플라자 ▲2011.4~현재 광주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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