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행사에 처음으로 참여했던 경험은 고등학교 때다. 5·18 기념재단에서 주최하는 5·18전국고등학생토론대회에 참여했다. 당시 토론 주제가 88만원세대와 5·18이었는데, 88만원세대를 앞둔 우리는 주먹밥을 나누며 함께 싸우던 5·18을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는 식의 발표문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렇게 억지로 5·18과 짜맞춘 토론 외에는 토론대회에서 5·18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토론대회가 5·18자유공원에서 열렸지만 잔디밭만 빌렸을 뿐, 그곳이 1980년 당시 영창으로 사용됐다는 가슴 아픈 소리는 그 누구도 들려주지 않았다. 또 밤에 5·18 국립묘지를 찾아가 헌화했지만 이 역시 헌화 뿐이었다. 왜 우리가 국립묘지에 가서 국화꽃을 두고 와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필자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대학생이 돼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는데 그 때에도 5·18정신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함께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건국대 학생은 “토론대회 이름 앞에 붙은 5·18의 이름이 무색하다”며 직접 버스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쳤다. 하지만 학생들은 잠을 자거나, 토론 준비에만 열심일 뿐 주의 깊게 따라 부르지 않았다.

다행인건지 불행인건지, 대학에 와 보니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들 5·18은 분명 기억해야 할 역사가 맞지만 5·18 행사에는 거부감을 표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주최 측이 만든 행사 틀 안에서, 그 틀대로 5·18을 느끼라고 강요받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렇다. 수많은 사적지를 돌면서 사적지를 꼼꼼히 돌아보기도 전에 소개만 받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는 그런 행사는, 5·18을 재현한다며 군복, 교복을 입고 금남로를 뛰어다니는 그런 행사는 마치 우리가 5·18을 꼭 지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보다는 5·18을 진정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행사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당시 시민군은 왜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었는지, 얼마나 아파했는지, 그토록 싸우며 무엇을 얻어내고자 하는 지 등을 입으로 직접 들려준다면 지금보다 더 와닿는 5·18이 될 수 있을 거다.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