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아들’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아마도 모유를 수유하는 어머니의 모습이나, 헌신적인 어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요즘 이슈화되는 기사들을 보면 부모자식간의 ‘애정’은 없고 ‘관계’만이 남은 것 같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부모와 자식의 감정은 배제되고 양육과 성장만이 있는 사육의 관계, 자식에 대한 인간적인 것, 부모에 대한 감정은 거세된 감정 말이다.

극중 ‘어머니(에바)’의 역을 맡은 ‘틸다 스윈튼’은 정말로 엄마라는 배역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가 맡은 대부분의 배역은 남성을 압도할 만큼 큰 자존감과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들을 표현해낸 연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번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깡마른 체구, 창백한 얼굴 중저음역대의 목소리는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와는 정 반대이다. 출산 직후의 절망하는 듯한 무기력한 표정과 아이의 울음을 참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그녀의 표정은 마치 자식이 괴물같이 이질적 존재라는 느낌을 자아낸다. 자식이 괴물 같다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케빈’은 괴물로 자라난다. 케빈은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다룬 영화 ‘엘리펀트’의 아이들처럼 감정이 없어 보인다.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는 어머니에게 폭력으로서 화답을 하고 오직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폭력만이 케빈을 살게 하는 양식이다.

이렇듯 영화는 케빈의 폭력과 그것을 대처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앞서 말했듯 어머니는 어머니가 되는 것을 두려워, 아니 거부하고 싶어 한다. 아이는 그녀의 삶을 앗아가는 존재라고 느낀다. 그러한 그녀도 결국에는 여느 어머니와 같이 자식에 대한 애정을 보내지만 자식은 이것을 거부한다. 마치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부정적 감정이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느껴온 것과 같이 어머니를 증오한다.

케빈의 폭력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동반한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그의 폭력의 방향을 종잡을 수 없게 된다. 폭력이 시발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력이 도대체 무엇을 향했는지에 대하여 영화는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 최근의 ‘보스턴 테러’ 사건처럼 방향을 알 수 없는 폭력은 현실에도 나타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력이, 그것도 젊은이들이 행하는 폭력의 근원이 무엇인지 이제는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영화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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