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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역사,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다■ 세상을 품에 안은 전남대인 51 - 광주트라우마센터장 강용주 동문(의예·82)
김성희 기자  |  sd8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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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4.15  09:4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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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간첩단 사건’ 연루로 14년 감옥생활…고통 속 신념 지켜

   
   

“80년 5월, 영혼에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다시는 옛날로 돌아 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열아홉, 광주항쟁 마지막 날까지 총을 들었다. 무고한 죽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국가폭력의 무서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대학에 간 그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은 그를 ‘간첩’이라 지목했다. 5공의 대표적인 조작간첩단 사건인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서 14년을 살았다. 홀로 ‘사상전향서’를 쓰지 않고 외롭게 버텼다. 더는 비정상적인 국가 행위에 굴복할 수 없었다. 이후 학교로 돌아온 그는 의사가 됐고 지금은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치유하며, 그들에게 치유 받으며 산다. 굴곡진 인생을 걸어온 광주트라우마센터장 강용주 동문(의예·82)이다.

▲산 자의 부끄러움
그날 광주에는 가랑비가 내렸다. 27일 새벽, 도청 앞 최후의 항전을 앞두고 어머니를 뵈러 집으로 갔다.
“내가 죽은 줄 알고 한참 우시던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께 시위 하러 가겠다 했다.”
안 된다며 울던 강 동문의 어머니는 담배 한 갑을 사왔다. 강 동문의 어머니는 그에게 담배를 주면서 “가라”고 말했다.
계엄군과 시민군의 최후의 항전이 시작됐다. 무자비한 진압에 시민군은 결국 항복했고 강 동문은 총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때 그는 자신의 영혼에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이 그를 괴롭혔다. 고등학교를 그만뒀다. 노가다를 전전하며 세상에 분노 했다. 자기 국민을 죽이는 나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절망하는 그를 붙잡은 것은 어머니였다. ‘다시 학교에 가달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원래 다니던 학교는 그를 ‘폭도’라며 받아주지 않아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광덕고로 갔다.
다음해 우리 대학 의예과에 입학했다. 학교엔 갔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부끄러움과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에서 들끓었다. 언론은 광주를 폭도로 몰아세웠고, 광주시민의 죽음을 북한 괴뢰군의 죽음이라고 왜곡했다. 진실을 아는 자의 자괴감과 분노는 그를 열혈 운동권으로 바꿔놓았다.
“공부는 관심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북과 미국에 대한 책을 모조리 읽었다. 알아야 제대로 된 진실을 알 수 있다 생각했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영혼 구하기
강 동문이 학생운동에 열을 올리던 때 사건은 터졌다. 85년 6월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에 연루돼 ‘한번 가면 멀쩡하게 돌아오기 힘들다’는 남산 안기부에 끌려갔다. 그는 ‘매질에는 장사 없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나는 간첩입니다”며 거짓 고백했다.
“내 영혼이 쓰레기통에 처박힌 순간이었다. 다시는 건져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결심했다. 잘못된 것과 철저히 싸우겠다고 말이다.”
재판장에서부터 강 동문의 싸움은 시작됐다. “간첩 아닌 거 아는데 한번 찍히면 끝이니 그냥 인정하라”는 검사의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에게 내려진 선고는 무기징역이었다. 대전교도소로 송치된 후 사상전향을 요구받았지만 거부했다. “사상전향제는 불가침의 영역인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며 인간 존엄을 무너트린다”고 봤기 때문이다. 또 그는 간첩이 아니었기에 당연했다.
“사상전향제 폐지를 요구하며 단식을 밥 먹듯 했다. 감옥에서 300일이 넘게 굶었다. 헌법소원도 냈다. 사상전향제를 폐지하고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홀가분했다. 더는 세상에 진 빚이 없다고 생각됐다. 나는 이제 자유로운 몸이 됐다.”
강 동문의 외로운 싸움은 14년이 지나서야 끝났다. 14년간 단절됐던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제적 상태였던 강 동문의 복학은 불가능했다. 그때 노성만 총장이 강 동문을 위해 학칙을 개정하려고 일일이 교수들을 찾아다녔다. 각고의 노력 끝에 강 동문은 우리 대학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강 동문은 자신이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98학번 후배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필기조차 벅차하던 그에게 자신의 노트를 보여주는 등 후배들은 늘 그를 도왔다.
강 동문은 졸업 때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공부를 못해서 공로상을 받았다. 상장에는 ‘성적이 우수하여’가 아닌 ‘위 학생은 인화단결에 힘써…’라고 써있다.(웃음)” 그가 상을 받으러 나갈 때 의대 졸업생 모두가 학사모를 던지며 박수쳐줬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주는 치유
‘시간이 약’이라지만 광주항쟁, 안기부의 고문, 감옥에서의 14년을 겪은 강 동문에게 시간은 약이 되지 못했다. 졸업 후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됐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폭력의 현장 속에 있다.
다신 광주도 오고 싶지 않았다. 아픈 기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 대해서도 눈이 멀게 된다”고 생각하는 강 동문은 광주를, 국가폭력 희생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시작은 소박했다. “아픔과 아픔이 만나 성장한다”고 믿는 강 동문은 스스로 ‘상처 입은 치유자’라 부르며 다른 피해자들을 돕기 시작했다. 2008년 고문 피해자 치유 모임을 시작했고 2010년 사단법인 ‘진실의 힘’을 만들었다. 현재는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을 맡아 고문 피해자들의 진상규명과 트라우마 치유를 돕고 있다.
강 동문은 국가가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을 위해서는 ‘희생자의 관점’에서 봐야한다고 말했다. “5.18 민주항쟁 관련자의 자살률은 10.2% 이른다. 이는 과거 청산에 있어 국가가 희생자의 고통을 무시한 결과다. 보상만 해준다고 끝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80년 그리고 고문의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제대로 치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위한 치유 공간이 있어야 한다.”
강 동문은 “여전히 국가폭력의 기억은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폭력의 기억들은 꼭 화상자국 같다. 불에 가까이 가면 상처가 더 고통스러운 것처럼 그도 광주에 올 때면, 광주항쟁으로 희생당한 이들을 볼 때며 자신의 고통들이 선명해진다. 하지만 이젠 외면하지 않는다. 도망치지 않는다. 다른 피해자들을 치유하며, 그들에게 치유 받고 있는 강 동문은 폭력의 현장에서 천천히 한걸음씩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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