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리서 한·미 경제 교육 맡기도…“역경 속 기회 찾아 돌파”

최루탄 가스를 피해 도망 다녔던 기억, 동기들과 사회적 문제를 놓고 열띠게 토론했던 기억, 세상을 향한 청년들의 외침, 이 모든 것이 정제국 동문(농업경제·86)이 떠올리는 대학시절의 모습들이다. “격변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대학시절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

그는 미국에서 박사를 마치고 현재는 미주리 대학 아시안 어페어 센터(Asian Afairs Center)에서 10년 가까이 국제교류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미주리와 전남대의 국제 교류 프로그램으로 지금까지 전남대 학생 164명을 교육시켰다. 또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미주리서 한·미 경제 분야에 대한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대학, ‘풍랑의 기억’
장성에서 태어난 정 동문은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꿈이 있었다. 어렵기만 한 농촌을 살리고 싶다는 꿈. 때문에 농업 경제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다. 농업을 살릴 수 있는 경제구조는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러다 전남대 농업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해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못 되었다. ‘사회 운동’에 대한 고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5·18민중항쟁 등을 직접 겪진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아픔에 함께 공감했다. 박승희 열사 분신 현장에서 시대가 안고 있는 아픔에 괴로워했다. 그는 졸업하는 순간까지 운동과 학업을 놓고 고민하는 연장선에 있었다.

군대라는 “인생의 휴지기간”을 거친 후 정 동문은 학업을 선택했다. 정 동문의 대학 생활에 항상 믿음만을 주시던 대학 은사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다. 졸업 후 정 동문은 학사와 같은 전공으로 전남대 대학원에 들어갔다. 석사를 마칠 때까지 그는 영어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지도교수가 은연중에 키워준 공부의 꿈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8~90년대, 정 동문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것은 반정부, 반미 등의 사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을 알아야 미국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은사님의 적극적인 미국 유학 권유를 받아들여 그 길로 유학길에 올랐다”고 말했다. 

미국서 학위를 마치기까지
가정환경이 유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학길에 오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시 미국 대학원을 다니면서 금전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용기를 냈고, 1997년 처음 미국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 동문은 미주리 대학 농업경제 관련 전공 분야 대학원에 진학해 자료조사 아르바이트와 교수 보조 업무를 병행하며 학비를 벌었다. 다행히 조교를 할 수 있게 되어 대학에 다니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박사 논문 지도 교수님이 4번이나 바뀌는 상황에 맞닥뜨려 “미국생활을 계속 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갈림길에 서기도 했다.

대학원 박사 과정 중간에 보는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논문만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계속되는 지도교수와의 시련으로 정 동문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지도교수가 갑자기 이직하거나 논문주제가 전공과 맞지 않다고 포기하는 교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교수가 바뀐다는 것은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보통 4년 정도 걸리는 박사취득 기간이 이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길어져 그는 10년이라는 세월을 박사 학위에 매달리게 됐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긴 ‘자신과의 싸움’에서 정 동문이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다섯 번째 지도교수님 덕분”이었다.

“내가 처한 개인적 환경을 이해하고 큰 용기를 줬다. 아마 이 교수마저 나를 거부했다면 나는 박사과정을 포기했을 것이다. 교수는 내게 “내가 너를 포기한다면 너와 너의 가정이 힘들어 질 테니 내가 널 받아주겠다”고 말했다. 교수는 나를 조교로 고용해 학비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일방적인 지시보다 나에 대한 ‘지지’가 더 많았던 분이다. 박사 취득 과정에서 엄청난 영감과 용기를 줬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정신을 심어준 고마운 분이다.”

1998년에 시작한 박사 학위 과정은 2009년이 되어서야 마칠 수 있었다.

미주리 아시안어페어센터 글로벌 리더십 코디네이터
2006년, 박사 과정을 밟던 중 미주리 대학 아시안어페어센터에 근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아시안어페어센터는 아시아권 대학 및 연구소와 교류하는 조직이다. 정부와 여러 재단의 후원을 받으며 타국과의 관계 확장에 힘을 쏟고 있다. 이곳에서 정 동문은 “그동안 쌓아왔던 나의 경험들과 전공분야를 접목시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 좋았다”고 말했다.

정 동문이 아시안어페어센터에서 주로 맡은 업무는 글로벌 리더십 프로그램과 교육 훈련 프로그램 등이다. 다른 학과, 연구소 등의 기관에게 아시아 학문 연구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프로그램들이 많은 편이다. 또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 분야를 가르치기도 한다. 정 동문은 이번 학기 한미 경제 관련 분야를 가르치고 있다. 특히 사람을 만나고, 계속되는 사람과의 뜻 깊은 소통에 대한 보람을 크게 느꼈던 정 동문은 이 때문에 2009년 학위를 마치고도 아시안어페어센터 조직에 남았다.

“학생들이 향상되고 발전돼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4~5년 전,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썸머캠프’를 아시안어페어센터에서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말도 없고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던 학생들이 4주 후 변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기간에 상관없이 교육의 힘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 계기였다.”

이곳에서 정 동문은 미주리 대학과 전남대의 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한국인 학생들과 미주리 학생들의 교류를 늘리기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 등을 설계하기도 한다. 교환학생, 인턴십 프로그램, 글로벌 리더십 프로그램 등 다양하다. 최근 7년간 아시안어페어센터를 거쳐 간 전남대 학생만 지금까지 164명이다.

미국 내 다소 보수적인 중서부 지역에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인식을 제고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정 동문은 “교류의 가치를 인정받고 국경을 넘어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진, 다름을 인정하는 확장된 사회를 꿈꾸며 아시아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많이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또 앞으로 그는 “미국인들이 한국을 많이 찾을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내가 몰랐던 나만의 가치 발견해야”
“인생은 고불고불한 도로를 가는 것과 같다.”

풍랑의 대학시절을 보냈다는 정 동문은 “대학시절 고민의 순간순간에서 만났던 친구들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친구들과 나눴던 대화들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했다. 정 동문은 “치열하게 고민하는 열정을 갖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교육 프로그램을 이끌면서 “열정 있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얻어가는 것을 눈으로 봐왔기 때문”이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라는 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내 뜻대로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 내가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꿈을 향해 돌진한다면 그 목표를 이룰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겠나.”

고난과 역경, 위기와 고민의 시간들을 보내왔다. 고불고불하게 걸어온 인생길에 더해서 앞으로 남은 길도 고불고불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 동문은 “내가 몰라줬던 나만의 가치, 나의 가능성을 발견하라”며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위해 ‘뚝심’으로 버티고 나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제국 동문은 ▲1986년 전남대 농업경제학과 입학 ▲1997년 전남대 농업경제학 석사 취득 ▲2006년~현 Coordinator, Global Leadership Program, Asian Affairs Center, University of Missouri-Columbia ▲2009년 Doctor of Philosophy in Agricultural and Applied Economics, College of Agriculture, Food and Natural Resources, University of Missouri-Colum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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