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어 유난히도 추웠고 2월 말까지도 맹위를 떨치던 올 겨울도 지나가서 봄이 왔다. 살랑이는 따뜻한 봄바람이 처녀 가슴에 불을 놓아 새순 돋는 가지처럼 생기 있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3월이면 새 학기가 시작된다. 돌이켜보면 국민(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식 했던 때가 어렴부시 기억 속을 스쳐간다.

1967년 3월 국민학교 입학식 때 설레는 마음으로 왼쪽 가슴에 명찰과 하얀 손수건을 매달고 코를 풀면서 학교운동장에 섰던 기억이 생생하다. 소문에 의하면 동네 친구는 벌써 한글 읽기와 쓰기를 끝냈다고 하여 빨리 공부를 해야겠다는 각오와 함께... 1979년에 전남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했던 때는 그 넓은 용봉동 운동장에서 지방에서 오신 아버님과 사진 몇 장 찍는 것으로 축하를 대신했다. 1979, 1980년 의예과 생활은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근대 격변기 시대였다. 박정희대통령 사망과 민주화의 봄, 5·18 광주민주화 운동, 순수한 민주학생의 일원으로 구 도청 앞 횃불행진, 계엄군과 대치...눈앞에서 펼쳐졌던 무자비한 진압...그리고 민주시민의 희생...이런 과정 속에서 의예과 2년 중 실질적으로 강의를 받았던 것은 2학기도 채 안 되었을 것이다.

1981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본과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동기생 이십 여명은 낙제하는 시련을 뒤로하고. 예과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학동 의대캠퍼스에서 본과 선배들의 존재는 하늘이었다. 이미 본과 선배들의 오리엔테이션 때 책상위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고, 본과 1학년생 밑에는 시멘트 바닥 밖에 없다는 공포를 심어줬었다. 문제는 해부학이었다. 강의 시간도 제일 많을 뿐 더러 학점도 제일 높아 이 과목에서 과락이면 낙제로 이어지는 치명타를 입었다. 하여 본과 진입하기 전 겨울부터 미리 스터디그룹으로 선행학습을 반드시 하여 강의와 쉴 새 없이 진행되는 구술, 필기, 실습시험에 대비를 해야 했다. 동아리 친구 여덟명은 대오각성 의기투합하여 집단 선행학습을 하기로 하였고 당시 중앙고속터미널 근처 여인숙에서 한 달 정도 방 몇 개를 빌고 공부를 하였다.

동아리 대대로 물려온 뼈대를 부여잡고 여기서 근육이 시작되어서 이렇게 돌아가다가 거기서 부착되고, 대동맥은 심장에서 시작되어 온몸 구석구석을 순환하다가 다시 대정맥으로 돌아가고, 안면 신경은 얼굴의 어떤 구멍에서 나와 어디로 가니 주의해야 되고...여인숙이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밤중에 데이트 왔던 선남선녀들과 시끄럽다고 싸우기도 많이 했다. 그래도 공부하는 의학도의 열정을 이해하여 사랑도 일부러 얌전하게 하는 배려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개학 후 우리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해부학을 통과하여 모두 낙방 없이 지금 대학과 개원가를 주름잡고 있다. 당시 3월을 무수한 시험 속에 정신없이 지내다가 학교 교정(학동 의학박물관 뒤쪽)에 백옥같이 하얗게 핀 목련을 4월 중순경에 보았다. 눈이 부시게 하얀 목련은 그간의 고행이 끝남을 축하하는 듯 하였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3월을 아름다운 결과로 가는 뜻 깊은 시작이라 여기고 새롭게 다짐했던 각오와 이번 새 학기에 꼭 해야 될 목포를 세우시길 바란다. 올해도 학교 교정에 핀 하얀 목련꽃을 보면서 학생 때 지녔던 마음와 희망을 되새길 것이다.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