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하다. 끔찍하다. 새해면 으레 생기던 설렘 같은 것도 없다. 패배의 충격과 허무 때문만은 아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절망감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던 세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꺾였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새마을 운동이나 낙숫물이 아니라 사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가치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더 암울하고 끔찍하다.

세대론은 이번에도 선거를 분석하는 주요한 근거이다. 다만 이번에 문제가 되는 세대는 20대가 아니라 50대이다. 50대를 배제한 선거정책이 패배요인이라고 지적한다. 민주진영은 50대에게 이익을 보장하지 않았고, 불안한 50대는 더 큰 이익을 보장하는 쪽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을 보고 있노라면 더욱 절망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의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상식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정치의 형식적인 면에서는 87년에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우리의 삶과 정치의 내용은 항상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정치는 이익을 지키거나 뺏기 위한 권력싸움에 불과했고 절차는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나의 이익 때문에 동료의 불행을 무시하고, 지역의 이익을 위해 타 지역을 모함했고, 국가의 이익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동포를 도우려는 손길을 퍼주기라 비난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목숨을 잃었다. 더 이상 죽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부터 나온 담론이 상식이고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향한 무자비한 돌진에서 공포를 느꼈다. 이제는 그것을 멈춰야 한다고, 적어도 그 속도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가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물려주는 것과 같은 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렇지만 이번 선거 결과는 정반대이다. 그것은 민주·진보·정의·평화·연대 같은 것보다는 여전히 이익을 최우선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5년 동안 추악한 모습을 보면서 절망의 끝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최근 잇따른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당선자 측은 “그게 당선자와 무슨 상관이지요?”(시사IN 277호)라고 답했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저 잔혹한 한 마디는 우리가 밑바닥까지 절망하고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근원에서부터 다시 생각하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고자 했다.

<백년전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현대사에는 밝혀야 할 진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화해와 타협을 이야기했다. 바닥까지 절망하지 않고,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배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바닥까지 절망하고 그곳에서부터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싸워야 한다. 지금의 절망과 반성이 그 싸움의 힘이 되고 근거가 될 것이다. 이로부터 앞으로 5년을 조작된 기억과 그 찌꺼기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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