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소심한 무명 만화가의 집에 백과사전 판매 영업사원이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화장실을 잠깐 이용한다는 구실로 집안으로 들어온 그는 영업사원 특유의 친화력으로 만화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백과사전 전집을 판매하고자 한다. 집요하게 설득하는 영업사원의 달변에 만화가는 급기야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가족이 없어 '가정식 백반'을 먹어본 적이 없다는 만화가는 최근 가정식 요리를 배우고 있다면서 영업사원에게 같이 점심을 먹을 것을 권한다. 점심을 함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서로 초면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만화가와 영업사원 사이에 있었던 일들로 하여금 ‘선의의 거짓말’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처음의 흐름은 너무 가깝고 편해서 쉬이 소홀해져버릴 수도 있는 가족이나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듯 했다. 다른 반전이 없었어도 충분히 의미 있고, 멋진 연극이었으리라 생각하지만 나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 갈겼던 반전이 너무 놀라웠다. 작품 극 초반부터 충분히 깔려져 있었던 복선적인 동작과 대사들이 한 올, 한 올 풀리기 시작할 때 오는 서스펜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전 흔적이 아니라, 의미로 남고 싶어요.”

작품의 흐름이나 주제와 관련해서도 많은 복선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지만, 그 상황 자체에서 나는 그 말에 그냥 눈물이 났다. 무언가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해 본 적이 있어서였을까?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면 항상 웃는다. 나중에 그 사진을 보면서 그 때를 추억할 때 행복하게 보이고 싶어서일 것이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추억은 단순한 흔적이고, 후에 잠시나마 감상에 젖게 해주는 용도의 기억이다. 추억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그 자체로의 의미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혹은 나에게 의미로 남고 싶다. 의미로 남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의미로 살아가겠다. 흔적이 아닌 의미로 말이다.

누군가에게 아무렇게나 가볍게 던지는 선의의 거짓말들과 의미 없는 약속들. 또 뒤돌아서면 기억도 나지 않는 싸구려 동정심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아니라, 희망고문이 되어 폭력과 독이 될 수도 있다. 아직은 학생 신분이긴 하지만 나름의 여러 사회생활을 겪으면서 처세술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나이가 되었다. 처세술.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 말과 기술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너무나 단편적이고 이기적인 말과 기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길을 걷거나, 인터넷 기사를 볼 때면 나보다 참으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동정을 하기도하고, 한번쯤은 도움을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뿐이지 그 사람의 삶을 진심으로 바라보고, 들어주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했던 적이 있었을까? 뒤돌아서서는 다시 나는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듣고, 이해하려고만 한다. 그렇게 뒤돌아서서 위를 바라보는 동안에 누군가 내게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그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지는 않았을까?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한다는 것. 공감. 처세술이라는 것은 각각의 상황에 맞게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고,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연극은 인생이고,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말을 많이 보고,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정말 우리 인생은 연극일지도 모른다. “연기는 진실 되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스타니 슬랍스키의 말처럼 나도 진실된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 나의 연극이 막을 내릴 때 즈음 그래도 난 진실된 연기를 했었다며 스스로를 다독여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아니, 살아야겠다. 아니,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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