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는 맛에 있어서 보통 음식맛과는 다른 특별한 맛이란 의미의 순우리말로 남도 음식에만 사용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명품과 사치에 대한 이야기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상류층 사람들도, 그럭저럭 살만한 중산층도, 심지어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든 저소득 계층도 명품을 구입한다. 그들은 왜 그렇게도 명품을 사랑하며, 동경하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 김난도 교수는 처음에 이 책을 논문 형태의 연구 결과로 발표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제는 이론적 탐구보다는 사회적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대중적인 책 형태로 출간한 것이다. 원래는 연구 논문이었던 것만큼 치밀하게 구성된 <사치의 나라, 럭셔리 코리아>는 실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인터뷰를 통해 얻어진 '명품 소비 증후군'의 원인과 그 형태 등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왜 명품을 사고, 왜 사치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 김난도, <사치의 나라, 럭셔리 코리아>.

사치와 명품은 계속해서 있어왔다
‘사치'라는 말을 사전에서 보면 ‘필요 이상’, ‘쓸데없음’, ‘분수에 넘침’으로 풀이해놓고 있다. 명품이 사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는 계속 ‘쓸 데 없는’ 물건을 그렇게도 열망한다. 사치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갈 생각은 없지만, 소크라테스도 “요새 사치가 너무 심하다”고 개탄했다하고,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은 ‘포틀라치’라는 축제를 통해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도 했단다. 사치의 역사가 긴 셈이다.

물론 사치는 삶의 질과 전혀 관계가 없다. 또한 ‘명품’이 인간의 고귀함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콩나물 값 100원을 깎으려고 아등바등하면서도 100만 원짜리 명품 핸드백은 거침없이 구매한다. 앨 고어는 <불편한 진실>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면서 살아간다고 지적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닌걸, 뭐” 혹은 “물건 사는 낙이라도 있어야지”라고 합리화하지만 불편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진실을 덮어쓰지도 못하고. 그런데도 우리는 그저 모두가 아는 ‘불편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사치를 하게 되는 것일까? 사치품에 지나친 금액을 투자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사치를 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했다.

과시와 질시, 환상과 동조의 사치
사치를 하는 이유를 보자. 첫 번째는 과시형 사치. 자신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고, 다른 이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서 소비를 하는 소비자가 이 유형에 속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부유층들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급을 효과적으로 과시하고 구별할 수 있는 표식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대중화된 명품 브랜드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특별한 브랜드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지위를 표시하기 위한 ‘보이는 잉크’가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는 질시형 사치.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에 대한 시기심과 그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치를 하고 그 사람과 동등한 입장에 서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느끼는 경우다. 이들은 흔히 ‘가짜 부자’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부유층의 생활 방식을 동경하고 모방하지만 구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구두면 구두, 가방이면 가방, 특정 품목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세 번째는 환상형 사치. 자신을 조금 더 나아보이게 하기 위해서 사치를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 “사치품은 하나의 갑옷 역할”을 한다. 언뜻 질시형과 비슷하지만 질시형이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유형이라면 환상형은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느끼는 것을 공포로 받아들인다. 이들에게 명품 소비는 그 공포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다.

네 번째는 동조형 사치.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사람(또는 무리)을 따라가는 유형이다. “남들이 다 하니까. 뒤처지거나 따돌림을 받지 않아야 하니까”하는 공포와 동조가 함께 한다. 동조형 명품 소비는 사회적 판단력이 부족하고 주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미성년이나 청소년층에서 많이 발견된다.

한편 과시형 소비와 질시형 소비는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다. 중산층이 부유층을 따라 하기 시작하면 부유층은 소비의 강도를 더 높여버린다. 과시형 소비자들은 질시형 소비자들과 차별화를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고, 질시형 소비자들은 재빨리 이를 흉내 내기 시작한다.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이를 "차이화와 모방의 전진 과정"이라고 불렀다. 숨 가쁜 추격이다.

우리는 왜 명품에 열광하는가.
우리는 왜 명품에 열광하는가.

하지만 이와 같은 유형 분류는 사치하는 소비자의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지, 왜 우리 사회가 사치를 권하는 ‘럭셔리 코리아’가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답이 되기는 부족하다. 그 해답에는 개인적인 감정 외에 외적인 조건인 ‘사회의 동조’가 수반한다. 이 책에서는 이와 같은 외적 조건을 ‘마음의 버릇(habit of the hear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음의 버릇이란 “한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의식, 가치관, 일상생활의 관행 등을 지칭”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마음의 버릇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개인적인 감정과 마찬가지로 계층 의식, 평등지향, 나르시시즘, 집단의식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특히 우리 사회의 경우 평등의식이 높고 계층에 대한 불만이 크기 때문에 부유층에 대한 비판이 심한 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막상 자신이 능력을 갖추게 되면 그들의 행태를 추종하는 경향을 보인다. “질시하는 감정은 질시 받고 싶은 욕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혹은 여러분의 부모님들은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따져보자. 명품소비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거의 이 네 가지 유형에 속한다고 봐도 지나친 과장이 아닐 것이다.

명품 소비와 권력의 문제
‘명품 신드롬’이 사회에 혹은 개인에 어떤 해악을 미치는지 모두들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명품 신드롬’은 상품을 질이 아닌 브랜드로 비교한다. 인간을 철저히 소비적, 물질적으로 변모시킨다. 몇 백만 원씩 하는 명품 백을 구입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또 원하던 상품을 구입한 후에는 그 상품과 어울리는 또 다른 명품을 구매하기 위해 다시 그런 생활을 반복한다. 이토록 간절하게 명품을 구매하려는 이유는 권력의 문제와 유관하다. 명품과 권력이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따지고 싶겠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곧 권력이다. 과거에는 출신에 따라 신분이 구분되었지만, 지금은 돈이 곧 신분인 사회다. 게다가 과거엔 신분체계가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돈’은 누구나 벌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길에서 구걸하는 걸인이 5년 후에 누군가를 고용하는 회사의 CEO가 돼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물론 어려운 일이긴 하다).

따라서 돈 즉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밖으로 드러내려 한다. 상위계층은 누구나 아는 비싼 상품을 구매해 드러내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인 부를 내보여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러한 욕구는 일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위계층이다. 위화감 때문이든 부러워서였든 어찌되었든 명품을 손에 넣으면 자신도 상류층으로 인식된다는 환상을 가지고 무리를 해서라도 명품을 소비한다. 그 후에 그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카드 돌려 막기,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기,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 않은 만족감과 또 다른 명품에 대한 욕구.

‘된장녀’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특정 브랜드의 커피를 마시는 이들을 가리켰던 이 말이 이제는 한국 여성 집단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확대된 감이 있다. 누가 만들어낸 단어인진 모르겠지만, 여성들의 소비 행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득 담은 단어임은 분명하다. 왜 이와 같은 단어가 버젓이 유통될 수 있었을까? 남성과 여성의 문제를 떠나 ‘과소비’라는,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문제가 없었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단어다. 이처럼 특정 계층을 지칭하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과소비는 개개인의 문제를 뛰어넘어 집단의 문제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저자는 그 중에서도 명품에 열광하는 현상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 김난도 교수.

원인은 우리 사회에 있다
자본주의 질서가 도입되면서 나타난 빈부 격차. 사람들은 빈부 격차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없었고, 따라서 우리 사회에는 부자의 여유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지 못하다. 사람들은 부유한 계층의 사치를 용납할 수 없고, 다른 계층에 속한 이들도 당연히 향유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경제적 여건의 차이와 상관없이 부유층의 소비가 사회 전 계층의 표준적인 소비로서 인정되기 시작한다. 물론, 부유층은 끊임없이 자신을 타 계층과 구분 짓기 위한 유행을 창조해낼 것이다. 이러한 경우, 부유층은 모든 계층의 사치를 이끄는 선도 그룹으로서 그리고 타 계층은 부유층의 사치를 따르는 추종 그룹으로서 행동하게 되며, 전 계층은 사치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지나칠 정도로 소비를 조장하고 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아니, 거리 곳곳에서 우리는 광고와 만난다. 소비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지갑을 열게 만들고 있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특정 가격 이상의 상품을 선물해야만 할 것 같고, 급기야 돈이 없어 사람을 못 사귀는 것 같단 생각마저 들 수 있다. 과거 아이들에겐 놀이터가 놀이 공간이었다면 요즘 아이들에겐 동대문의 대형 매장이 최고의 놀이공간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많은 이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범주를 뛰어넘는 소비를 하게 된다. 소비가 사치로 변모한 데는 우리 사회에도 적지 않은 원인이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런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사회 풍토는 어떨까? 결국 대한민국은, ‘소비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그런 사회일까?

돈과 삶 중에 당신은 무엇을 택할 것인가
미국의 소비만능주의를 경고한 책 <어플루엔자>의 저자 존 더그라프는 “상품의 로고는 100가지도 넘게 알지만 나무 종류는 10가지도 알지 못합니다”라고 개탄한다. 김난도 교수는 책에서 “행복한 삶이 곧 명품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가 삶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우리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쇼핑이 주는 기쁨이 아닐 것이다. 한 아이가 진정 행복한 성인으로 자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고급 상품이 몇 개인지가 아니라 친구와 새로 사귀는 법을 배우고, 자연과 교감하며, 사람을 그리워하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감정을 키울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어린이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행복의 조건들인 것이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시간이다. 상업주의 문화가 소비의 양으로 행복을 마름질하면서 우리 생활은 너무 각박해졌다. 과도한 업무 속에 숨 막히듯 살아가는 이들은 다들 너무 바빠 보이기만 하다. 사회가 소비 지향적으로 변하고 소비가 성취와 행복의 척도가 되면서 소비 지향적 자원인 돈의 중요성이 계속 커지게 되며, 우리는 이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이 경쟁하고 더 오래 일을 해야만 한다.

에리히 프롬이 비유했듯 소비라는 목발을 짚지 않고는 바로 설 수 없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물건을 사는 열정, 돈을 위한 열정을, 삶을 사는 열정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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