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력 대선 후보들이 정치개혁의 깃발을 내걸고 있다. 특히 문재인-안철수는 ‘새정치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불신과 환멸의 대상인 정치판을 “한번 갈아엎어 보자”는 국민대중의 분노와 열망에 대한 화답이리라.

새정치 공동선언은 미국식 정치개혁
새정치 공동선언은 대통령·국회의원 기득권 내려놓기, 권력기관 민주화, 정당혁신 등을 담고 있다. 그것은 ‘고비용-저효율 정치’를 혁파하려는 신자유주의적 독트린, 탈권위주의·반부패 등 정치윤리를 복원하려는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정당 조직과 운영 등 정당 내부의 쇄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이런 미국식 정치개혁은 필요하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특히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 하에서 신자유주의적, 도덕주의적 정치개혁과 정당 내부 개혁은 수없이 시도되어 왔고 그 성과도 없지 않다. 그런데도 사회경제적 양극화로 ‘눈물의 계곡’은 깊어만 간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도덕주의적 정치개혁, 정당 내부 쇄신 등 미국식 정치개혁은 한국민주주의의 심화 발전을 위한 정치혁신의 본질이 아니다. 새정치 공동선언은 바로 이 지점을 놓치고 있다.

야권 단일 후보의 패러다임 교체 필요
이런 의미에서 문재인-안철수 중 야권 단일 후보는 정치혁신안을 정치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새롭게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

정치패러다임 교체의 첫 단추는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혁신이다.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정당체제와 정부유형·이념적 성격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며 종국적으로 경제민주화-복지국가 유형을 규정하는 강력한 독립변수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정치혁신의 핵심 지렛대는 비례성이 높은 국회의원 선거제도이다. 물론 새정치 공동선언은 비례대표 의석 확대와 지역구 의석 축소를 포함하고 있다. 비례대표의 비율, 정당명부 작성 방식 등 각론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으나 그 선언은 아마도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를 근간으로 하고 이의 불비례성을 완화하기 위해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병립적으로 결합하는 일본식 선거제도를 상정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이라면 이 제도는 비례성을 유의미하게 보장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새누리당-민주통합당, 지역에 기반을 둔 거대 패권 양당제-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반면, 계급·계층적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가치·정책 정당의 약진과 육성을 어렵게 할 것이다.

한마디로 현재의 폐쇄적인 거대 정당의 독과점적 구조가 재현된다. 일본의 거대 기득권 양당정치가 그러 하듯이 결국 거대 패권 양당 간 증오의 정치는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구조이다.

국회의원 선거제도 혁신안 내 놓아야
이 점과 관련하여 미국 해커(J. Hacker)와 피어슨(P. Pierson) 교수는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를 근간으로 하는 공화-민주 양당 중심의 미국 승자독식-양극화 대결정치가 미국 승자독식-양극화 경제의 원인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한국 새누리당-민주당 중심의 양대 패권 정당이 국회의석을 독과점하는 정치 카르텔 속에선 설령 야권 단일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 돼도 경제민주화-복지국가 건설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그의 경제민주화-복지국가 정책능력은 새누리당의 ‘몽니’ 혹은 대통령-국회 간 ‘바람 잘 날 없는’ 충돌에 의해 무력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야권 단일 후보는 이런 한국 정치의 비극을 돌파하는 정치혁신의 초석이라도 깔아놓는 준비를 해야 한다. 즉 발본적인 국회의원 선거제도 혁신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건 진보진영의 정치권-학계에서 이미 합의가 이뤄진 독일식 ‘2표 연동혼합형’ 비례대표제이다.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어느 정당이든 전국적으로 지지율만큼 의석을 가져감으로써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점유율을 거의 일치시키며 정당 중심의 비례대표제와 지역 중심의 다수대표제 간의 유기적인 연계 기제를 작동시켜 계층·집단·직능 대표성과 지역대표성을 절묘하게 조합한다. 

독일식 비례대표제 정당간 연합정치 유인
이 같은 특징을 갖는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다양한 색깔의 ‘무지개 다당체제’를 만들어 정당 간 연합정치를 유인한다. 노동·저소득층·빈곤층의 이익을 대표하며 ‘복지정치’를 지향하는 진보좌파 정당도, 계층적 중간집단과 이념적 중도층을 대표하며 ‘실용주의 정치’를 추구하는 중도정당도, 기업·사용주·상류층의 이해를 대표하며 ‘성장의 정치’를 지향하는 우파정당도 국회권력을 독과점하는 패권정당이 되는 것이 제도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당들은 국회-정부에서 교차적 협조가 아니면 파국이라는 인식을 갖고 정책 협상-타협-합의 기제를 작동시킨다. 즉 진보좌파-중도 간, 보수우파-중도 간, 진보좌파-보수우파 등 가치와 정책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연합정치가 제도화된다. 연합정치의 틀 속에서 정당들 사이에 어제의 경쟁자가 오늘의 연정 파트너가 되며 역으로 오늘의 연정 파트너가 내일의 경쟁자가 된다.

'정치시장의 유연화' 정책
이러한 ‘정치시장의 유연화’는 경제민주화-복지국가와 경제성장 사이의 선순환을 유도하는 정치적 조건이다. 한국 정치가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채택하면 각 정당과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가능한 많은 투표자의 혜택과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보편적 공공재 개발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할 것이다.

또 그들은 협소한 지역(구)의 개발 프로젝트에 전념하는 정치 브로커 역할에서 해방되어 전 국민의 삶의 질을 업그레이드하는 경제민주화-복지국가-경제성장 정책이슈에 보다 적극적으로 태클할 것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실제로 전후 선거제도 혁신을 통해 ‘사회적 시장경제’를 성취한 독일 정치, 또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를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전환시켜 신자유주의 정책 드라이브에 제동을 거는 뉴질랜드 정치에서 현실화되었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
하지만 문제는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어떻게 실현하는가에 있다. 선거제도 혁신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행 선거제도의 수혜집단인 국회의원들은 기존 선거제도 개혁에 조건반사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인다. 자신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소선거구 다수대표제 하에서 당선에 필요한 안정적 지지 그룹을 가진 정치인들이 자신의 지역구에 공들여 쌓아올린 정치적 기득권을 일거에 날려버릴지도 모를 선거제도 개혁을 수용하겠는가. 따라서 선거제도 혁신을 국회에 맡기는 것은 되레 개악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이런 우려 때문에 뉴질랜드는 1993년 국민투표를 통해 독일식 선거제도로의 변경을 관철시켰다.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제2의 민주화' 신호탄
12월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독일식 비례대표제가 주요 정치의제로 떠오르는 게 급선무다. 야권 단일 후보가 문재인이든 안철수이든 중대 결단을 해야 한다. 정치판을 바꾸라는 이른바 ‘안철수 현상’에 대한 응답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국회는 거대 기득권 집단인 새누리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하고 있어 선거제도 개혁의 저지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국회에서 이 장벽을 뚫는 방법은 새로 당선된 대통령이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국민투표에 회부하는 절차를 밟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야권 단일 후보는 선거제도 혁신을 대선 정국에서 최대 쟁점으로 부각시키는 데 앞장서야 한다.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한국 ‘제2의 민주화’운동의 신호탄이다. 바라건대, 세상의 틀을 바꾸고 반값등록금을 원한다면 대학생들은 야권 단일 후보에게 독일식 비례대표제가 핵심 선거공약으로 채택되도록 압박해야 한다.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울 수 있다는 각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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