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는 맛에 있어서 보통 음식맛과는 다른 특별한 맛이란 의미의 순우리말로 남도 음식에만 사용되고 있다.

▲ 레베카 솔닛.
자본주의는 세상을 부(富)로 가득 채웠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 왜 우울증 환자는 곳곳에서 넘쳐나고, 자살자도 늘어가기만 할까? 물론, 자본주의는 외롭고 헛헛한 사람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철저하게 ‘이윤'과 ‘경쟁 논리'를 통해서다.

마음이 괴롭다고? 그러면 심치 치료를 받아라. 자본주의는 개인의 우울을 밑천 삼아, ‘치료 문화(therapy culture)'를 창출했다. 심리 상담이 이익을 낳는 산업이 되었다는 뜻이다. 어디 그뿐인가. 자기계발 시장은 경쟁을 더더욱 부추긴다. 쓸쓸하고 힘들다고? 더 열심히 뛰어라! 성공을 거머쥐면 행복이 가득할 것이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의 저자 레베카 솔닛이 보는 이 시대의 모습이다.

아름다운 고통, ‘시민기질’

솔닛은 저널리즘을 전공한 사회운동가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까닭은 공동체가 무너졌다는 데 있다. 솔닛은 ‘재앙'에서 그 답을 찾는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재난'을 다룬다. 1906년 시카고 대지진에서 2005년 뉴올리언스 대홍수까지, 책에는 여러 재난이 소개되어 있다.

“고통 없는 세상은 고귀함 없는 세상이다."

솔닛이 재난을 바라보는 입장은 이 한마디로 정리된다. 재앙은 고통과 슬픔만을 안기지 않는다. 위기를 이겨내는 가운데서, 인간 고유의 따뜻함과 배려, 협력과 희생의 정신이 오롯이 피어난다. 처음에는 그의 말이 황당하게 다가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고개를 크게 끄덕이게 될 테다.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전쟁의 가치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하루하루 먹고 살 걱정에 사로잡힌 개인은 초라하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역사의 발전을 위해' 목숨을 거는 전사는 어떤가? 위대한 소명이 주어지는 순간, 인생은 활활 타오른다. 전쟁터 곳곳에서는 따뜻한 전우애와 숭고한 희생이 벌어진다. 윌리엄 제임스가 말하는 전쟁의 가치는 우리를 일상의 비루함에서 벗어나 고귀하게 만들어준다는 데 있다.

하지만 전쟁은 가족과 이웃의 삶을 무너뜨리는 짓이다. 파괴적인 전쟁 말고도, 우리 안의 이상을 일깨워주는 방법은 없을까? 삶의 의미와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연대를 안겨주는 사건 말이다. 이를 윌리엄 제임스는 전쟁의 ‘도덕적 등가물'이라고 부른다. 전쟁같이 야만적이지는 않지만, ‘시민기질-자기 삶을 숭고하게 이끌고 공동체 정신 속에서 헌신하는'일은 확실하게 살려내는 일이다.

미래의 대안, ‘공동체’

▲ 미래의 대안, '공동체'

솔닛은 사람들이 재앙의 기억을 떠올릴 때, 되레 ‘기쁨'을 느끼는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다.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나서서 서로를 돕는다. 사업을 말아먹어 본 자만이 한 푼이 절절한 이에게 돈을 빌려주는 법, 어려운 처지는 서로에 대한 공감을 낳는다. 모두가 나락으로 추락한 상황, 모두는 모두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다. 모르는 사람끼리도 쉽게 친해지며, 가진 것을 나누며 힘을 합친다는 의미다.

이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부터, 1917년 캐나다 핼리팩스 항구의 대폭발, 1940년 런던 대공습, 2001년 미국 9.11테러에 이르기까지, 어려움에 처한 시민들이 일관되게 보여 왔던 모습이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숨겨져 있던 공동체 정신을 회복한다. 그리곤 의미로 충만한 삶에서 행복을 느낀다.

자본주의는 모든 인관관계에 의미를 돈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 크로폿킨인 자연의 거친 생존투쟁에서 살아남는 종(種)은 공격성이 가장 강한 부류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오히려 서로 돕고 힘을 합칠 줄 아는 종(種)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성찰(省察)이다. 거듭되는 금융위기와 경제공황의 공포로 자본주의가 더 이상 미래적 대안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해지는 요즘, 공동체의 가치를 되새김해 보아야 할 때다.

 

▲ 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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