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 회의, 약 포장에 쉴 틈 없던 날들…주민들과 함께하는 봉사되길

▲ 우리가 진료 장소에 도착하기 전부터 문 앞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던 주민들. 그만큼 이들에겐 우리의 의료 혜택이 절실했을거다.
병원이 널리 있는 우리는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간단한 상처의 소독 정도만 할 수 있는 보건소가 전부인 아이티 사람들에게는 병원은 색다르고 꼭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수많은 아이티 주민들이 우리에게 왔고, 또 왔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환자였기에 어려움도 많았다. 소아 시럽이 부족하기도 하고 정신없이 진료만 해 주민들과 웃고 떠들 시간이 부족했다. 진료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느낀 2주간의 아이티 의료봉사 이야기를 지난 호에 이어 싣는다. /엮은이

우리는 모두 약사선생님
“일부러 문 열어놓고 약 싸는 거죠? 모르는 척 지나치고 싶어도 문이 열려있으니 지나치질 못하잖아요.”

무선인터넷을 찾아 복도로 나온 의사 선생님들이 약 싸는 작업을 시작한 방 안으로 들어와 볼멘소리를 한다. 그러면서도 다시 묻는다.

“약삽을 끼우면 되나요?”

한국에서 가져온 약품은 의료봉사 팀이 묶는 3층에서 가운데 방에 보관돼 있었다. 이곳에서는 밤마다 약품을 싸는 작업이 이뤄졌다.

아이티로 오기 전, 3일에 거쳐 약을 싸왔지만 우리가 가져온 약들은 대부분 성인용이었다. 예상 외로 소아환자가 많아 싸놓은 약을 뜯어 어린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두, 세 조각으로 잘라 다시 포장해야 했다.

오전 9시부터 4시까지 이어지는 진료에 씻고, 저녁 먹고 회의를 마치면 9시. 모두들 빨리 잠들고 싶어 했지만 약 싸는 일을 약사 선생님에게만 맡길 수 없었다. 각각의 진료실에서 사용할 약일뿐더러 ‘함께’ 봉사활동 하러 왔는데 약사 선생님만 밤새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약사 선생님이 “이 정도면 내일 충분히 쓸 수 있겠네요”할 때까지 모두 모여 약을 쪼개고, 약포지에 넣고, 약포지를 포장하고, 해·달 스티커를 붙였다.

약품 포장 외에 약사선생님이 하는 ‘복약 지도’도 함께 했다. 다섯 곳에 나뉘어 진료 받던 환자들이 모두 약을 받기 위해 약국으로 모여드니 약국은 언제나 북적북적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진료실에 환자가 없을 때면 통역을 데리고 곧장 약국으로 왔다.

“몇 번 환자부터 복약지도를 하면 되죠?”

때론 좁은 약국에 사람이 지나치게 많아 도리어 복잡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약사가 많은 덕분에’ 약국 문을 일찍 닫을 수 있었다.

300, 400…700명
내일은 몇 명의 환자를 진료할까.

매일 밤 회의의 주된 의제였다. 진료 첫 날만 해도 진료환자를 의사당 50명 씩, 총 300명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 외로 너무나 많은 주민들이 몰려왔다. 주민들은 우리가 진료 장소에 도착하기 전부터 진료실 문 앞으로 끝없이 줄을 서 있었다.

“작은 병원소가 전부인 이들은 우리에게 꼭 진료를 받고 싶어 해요. 무리해서라도 500여명 정도를 진료합시다.”

“많은 환자를 본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잖아요. 환자를 꼼꼼히 진료하지 못합니다. 400여명 정도만 봅시다.”

많은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좋지만, 대충 처방을 내리고 웃지 않는 모습으로 그들을 대한다면 진료하는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최대한 많은 주민이 우리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기다리는 환자가 너무 많네요. 오늘은 700명 진료하기로 합시다.”

진료 여덟 번째 날, 평소 환자인 450명으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며 박찬용 의료팀장이 700명을 제안했다.

그런데 700명을 진료했음에도 기다리는 줄을 줄지 않았다. 그렇다고 진료 시간을 연장하면 뒷정리 할 시간이 부족해 한국에 제 시간에 떠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진료 끝났습니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주민들은 문 앞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문 앞에 서성이는데 세아상역 직원 분이 다가와 넌지시 말했다.

“자꾸 문 앞에 있으면 진료 받지 못한 주민들은 진료해 줄 거란 기대를 하게 되요. 어쩔 수 없어요.”

우리도 어렵게 머나먼 이곳까지 왔고, 아이티 주민들도 어렵게 진료 장소를 찾아왔는데 결국 만날 수 없었다. 그저 다음에 만나도록 기약하는 수밖에.

▲ 피부 색, 언어, 거주 환경 등 아이티와 우리는 다른 것이 많다. 하지만 주사에 아파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비슷하다.
한 발자국만 더 나가볼 걸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란 쉽지만은 않다. 우리 대학에서 여섯 명(학생은 네 명), 전대병원에서 열여섯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의료봉사를 하는데 2억 7,000만원의 경비가 들었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액수지만 그래도 ‘다음에 또 와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우리가 진료 장소에 도착하기 전부터 문 앞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던 주민들. 그만큼 이들은 의료 혜택이 절실했고, 우리도 열심히 진료를 했다. 다만 봉사단원들 모두 “진료만 한 것이 아쉽다”고 입 모아 말했듯 “주민들과 살을 맞대며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필요”하다.

진료가 이뤄지는 곳에서 문을 열고 한 발자국만 나가도 아이티 주민들의 집이 나온다. 작은 나무로 울타리도 쳐놓고 빨래도 걸어놓은 모습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집이 한국의 거실만한 크기밖에 안되고 창문에 유리가 없는 등 우리와 크게 다르다.

“집이 저렇게 작은데 화장실이나 주방은 있을까?”, “전기가 없어 깜깜한데 어떻게 지낼까?”

많은 질문이 들었지만 버스 창문에 달라붙어 열심히 밖을 구경할 뿐이었다. 아이티에 도착하기 전부터 “치안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안전해 주의해야 한다”는 말에 지레 겁을 먹고 의료 봉사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시도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오유정 씨(경영학·08)는 말했다.

“한쪽이 아니라 양쪽에서 주고받으며 함께 즐기는 것이 봉사라 생각한다. 진료에 집중하기보다 주민의 집도 방문하고 함께 밥을 먹으며 많은 대화를 했다면 봉사의 의미가 더 짙어지지 않았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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