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제기 할 수 있어야

종교들 간에는 많은 차이점이 존재하나 모든 보편적 종교는 무언가 초월적인 존재를 바라보라는 가르침,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측은지심을 느끼고 그들과 건설적인 관계를 맺으라는 가르침에서 공통적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신과 함께 진실하고 건전한 삶을 살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특정 종교인이 이웃에게 고통을 준다면 그 종교는 이미 타락해버린 종교라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종교 자체가 인간이 만든 제도라는 측면에서 언제든지 타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각 종교가 신봉하는 경전과 교리를 통해 신자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종교의 핵심적인 진리와 만나게 된다.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바탕이 되는 경전을 갖고 있으며 경전에 대한 해석은 그 종교의 바탕이 되고 있다. 종교가 주장하는 교리가 상식적이고 보편적이며 배타적이지 않을 때 그 종교는 보편적 종교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일부 종교집단들은 보편적 진리에 대한 특정한 해석에 집착하는 수가 있다. 보편적인 종교의 가르침과 신앙을 절대적인 진리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다 보면 진리에 대한 특정한 해석에 집착하게 되고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게 되며 결국에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신봉하게 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보편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행위를 하게 되고 폭력적인 극단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특정한 개념이 경직된 교리와 신에 대한 독단적인 확신으로 발전하게 되면 종교 지도자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대담하게도 신을 대변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진정한 종교적 신앙을 대변한다고 말하며 타 종파 및 종교를 거짓 종교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신의 진리를 자신들만이 알고 있다는 경직된 주장 하에 무지와 편협된 설교로 신자들을 현혹시킨다.

경전은 종교에서 가장 쉽게 악용되는 요소이다. 경전은 그 경전을 신성시하며 일부만을 발췌해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악용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심지어 악마조차 자신의 목적에 걸맞는 성경구절을 인용할 수 있다. 편협한 시각으로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대개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미국의 인민사원, 일본의 옴 진리교, 한국의 오대양 종교가 그 예이며, 최근 이슬람교도들의 자살폭탄 공격은 이러한 현상의 극단적인 예이다.

일부 종교인들은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다양한 형태의 근본주의는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뭔가 분명한 지침을 얻고 싶다는 욕구와 관련된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여행과 같은 것으로 그 과정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변화를 겪으며 생활한다. 종교적 진리의 탐구는 고정된 실체를 아는 과정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계속 변화되는 과정에 대한 탐구이다. 불변의 진리는 없다.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우리의 사고도 계속 변화해가고 있으며 이런 과정에서 사람들은 더욱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고 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믿음과 사랑이다. 성경의 구절들은 결국 믿음과 사랑의 표현이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절대적인 진리로 변화될 수 없고 또 그것을 근거로 다른 종교들의 주장들을 폄하해서도 안 된다. 신에 대한 믿음과 인류에 대한 사랑은 각자가 다르게 자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든 간에 나름대로 모두 진리다. 내가 신을 믿고 내가 이웃과 부모형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이 그것을 표현방법과 당연히 다를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진리인지를 가린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진리에 대한 인간적인 시각은 역동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다. 절대적인 진리를 표명하는 사람은 도리어 경직되고 편협한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그는 흔히 자신이 신의 사도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이러한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들 중에 종교의 이름으로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큰 죄의식 없이 저지르는 경우가 발생한다.     

오늘날 우리는 종교적 다원주의 하에서 살고 있다. 이는 사회 내에서 국가에 의해 용인되고 서로 이질적인 여러 종교집단들이 경쟁적 상황에서 공존해 있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적 영역인 일과 사적 영역인 개인적인 삶의 두 영역 속에서 살아간다. 공적 영역에서 개인은 확고하게 구조화된 기능을 수행한다.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개인의 정체성은 지극히 비인격적이며 익명적이다. 그러나 사적 영역은 대단히 자율적이어서 각 개인은 자신의 선호에 따라 사적인 생활을 멋대로 계획해내갈 수 있다. 현대인이 사적인 생활에 집중하는 것은 공적 영역에서 좌절된 개인주의를 어느 정도 보상해주기 때문이다. 사적 영역에서 개인은 여러 선택이 가능한 다원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다원적 상황은 객관성 및 확실성보다는 주관성과 사적인 선택을 중시한다.

다원화가 일반화된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과거의 종교와 다르게 더 이상 절대적인 신념체계가 아니다. 모든 종교에 나름대로 불확실성이 존재하게 되면서 많은 분파 및 종파가 생겨났으며 이제 종교는 하나의 의견이 되고 선택사항이 되고 있다. 공적인 종교가 더욱 불확실해질수록 사람들은 사적인 종교를 더 추구하게 된다. 따라서 종교는 더욱 사적으로 개인화되고 있다. 종교가 선택의 문제가 되면서 개개인은 일종의 종교적 선호를 갖게 된다. 개인은 하나의 선택활동의 논리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 분파는 마치 판매를 기다리는 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는 물건들과 같게 되었다. 종교 기관들은 판매 대리인들로 생각된다. 종교는 이제 권위주의적으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시장 경제논리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 종교는 이제 하나의 상품으로 된 것이다. 교회 신도들은 각자의 논리와 선호에 맞는 교회를 선택하여 그 교회에 다니게 된다. 

다양성이 극대화되는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 즉 특이성과 다원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나와 다른 세계관, 종교관을 지닌 사람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야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다원주의 하에서 성실하게 자기 신앙을 지키면서도 자신이 경험한 신만이 유일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보편적 종교는 신도들에게 항상 의문을 갖고 종교적 삶에 대해 반성하고 생각해볼 시간을 갖길 권고한다.

만약 종교집단의 지도자가 정직한 의문을 억압하거나 금지한다면 거기에는 무엇인가 잘못이 존재한다. 만약 교리가 비윤리적인 것을 지지한다면 교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압박이 존재한다면 그 종교집단은 타락의 가능성이 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종교집단을 보면, 처음에는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사회적 문제들을 개혁하기 위한 훌륭한 프로그램으로 시작하지만 그 과정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을 때 그 종교집단은 ‘사회가 타락했으며 구원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여기게 되고 점차적으로 사회로부터 멀어져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된다. 사회로부터 분리되거나 고립된 채 한 사람 또는 몇 사람만이 결정을 내리는 종교집단에 묵시록적인 가르침까지 가미되면 곧 끔찍한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원적 사회의 보편적 종교에서 지성의 자유, 개인적인 자율성, 건전한 상식은 필수적인 요소다. 건전한 종교집단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확실한 보장을 해 주어야 하고 자기가 믿는 종교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그 종교집단은 경직된 교리 해석 및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 이웃 종교들과 함께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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