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문제가 정치인 정체성과 결합된 ‘네오콘’의 길

▲ 광주전남진보연대가 지난달 10일 무등산 입구에서 '6.10 항쟁 25주년, 한반도 평화실현! 종북마녀사냥 공안탄압 규탄' 시위를 벌였다. 사진은 전주연 시의원이 발언하고 있는 모습.

‘종북’은 우리사회에서만 있는 욕이다. 다른 어떤 욕보다도 심한 최대의 ‘언어테러’이다. 말 그대로라면 ‘북쪽사회를 추종하는 자’라는 비난이다. 자기들이 알기로 북쪽사회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아닌가? 매년 수백만이 굶어죽을 만큼 빈곤과 질병에 찌든 사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인민은 가난 속에 그대로 방치한 채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려는 독재자가 있는 곳, 그 독재자의 권력이 대를 이어 세습되어가는 곳인데 그런 줄도 모르고 그쪽 사회를 추종하니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팔푼이라는 경멸이 그 욕 속에 스며있다.

예전에는 그와 비슷한 욕으로 ‘빨갱이’가 있었다. 걸핏하면 사회적 혹은 정치적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밀리거나 답변할 말문이 막힐 때 상대방을 한 마디로 물리치는 효과적 방법으로 예부터 전해 내려온 욕이었다. 이는 C8보다 더 상대방을 격분시켜 폭력으로 유도하는 효과적인 욕으로도 쓰였다. 이 빨갱이가 종북이란 욕으로 변한 것에는 그만한 사회적 배경이 있다.

원래 빨갱이는 특별히 사상이나 행동을 가리킨 욕이 아니었다. 행동이나 사상에 대해서까지 엄밀한 잣대를 들이밀려면 여러 사상이나 행동을 식별할만한 깊은 지식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그것이 욕으로 될 수 없다. 감정상 자기와 같이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을 가리켜 욕할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런 욕을 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권력을 직접 가진 사람이거나 그런 권력을 배경으로 거기에 의지해서 욕하는 것이었다. 힘없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욕이 아니었다. 한번 그런 욕을 먹으면 그것을 반박할 논리나 근거가 원래부터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런 욕을 먹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요행히 자기가 거기서 제외되면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쉴 지경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을 거치면서부터는 빨갱이라고 욕하는 사람이야말로 오히려 같은 사회에서 상종할 수 없는 ‘학살자’ 혹은 학살자를 비호하는 파렴치범으로 공인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이 빨갱이란 욕은 꽤 오래 사람들의 입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다. 오히려 좌파이론이 주류시민권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좌파를 대변하던 민주노동당이 제도정치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부터 소위 진보그룹 내부에서 권력다툼을 위한 그들끼리의 내분이 일어났다. 그중 한쪽이 다른 쪽을 향해 종북이라고 욕하며 결별하면서부터 종북이란 욕은 빨갱이를 대신하는 욕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당시 욕을 한 사람들은 빨갱이와 종북을 구별해서 사용했겠지만 과거부터 빨갱이란 막강효력의 언어를 사용 못해 안달하던 사람들로서는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빨갱이가 바로 종북이고, 종북이 바로 빨갱이이다. 민주통합당 의원들 가운데에서도 한미FTA를 폐기해야 한다면 다 빨갱이이고 다 종북이다. 

빨갱이란 욕이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기까지 80년 5월의 광주항쟁이 필요했듯이 또다시 종북이란 욕이 우리사회에서 사라지려면 80년 5월의 광주항쟁에 버금가는 그 무엇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생기기 전에는 여간해서 그 빨갱이란 욕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5월의 광주항쟁에 버금가는 그 무엇은 그리 먼 훗날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환경이 크게 뒤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최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공개했고 핵무기도 공개했다. 그리고 북한은 스스로 자기들의 주적을 미국이라고 공표했다. 그런데 미국이나 일본은 어떤가? 2008년의 금융위기와 2011~12년의 재정위기로 미국 국내정치가 완전 교착상태에 빠져버렸다. 사회 전체적으로 빈곤과 실업이 늘어만 가는데 이를 해결할 국내정치가 완전한 교착상태에서 해법을 못 구하면 결국 사회내부로부터의 파열은 불가피해진다. 일본사회도 재정위기 금융위기에 휩쓸려 있기도 하지만 지난번 원전사고로 심리적 자신감이나 정상적 사고력까지도 잃고 있다. 정치인들의 첫째가는 의무가 무엇인가? 바로 국방 아닌가? 국내문제가 소란스러운데 외부의 적을 그대로 둘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래서 미국은 조만간 북한과 수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미국은 북한에 대해 인권문제, 대량살상무기, ‘3대 세습’을 구실로 북한내부의 테러를 지원해주고 가능한 한 북한내부에 사회적 소요를 만들어내어 무력침공의 구실을 만들려는 네오콘의 길을 걷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사회도 바로 이 네오콘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미국이 과거의 입장을 버리고 북한과 수교를 하게 되면 한국이 그래도 계속 네오콘의 길을 고집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미국처럼 지금까지의 주장과 입장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북한과 대화를 제의할 수 있을까? 미국에서는 같은 정치인이라도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대외정책을 180도 바꾸어도 아주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대북문제가 정치인 개개인들의 정체성과 밀접히 연관되기 때문에 네오콘의 길을 하루아침에 버리기 어렵다.

3대 세습의 실제 당사자인 김정은과 정상회담에서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북한의 3대 세습을 비난한 적이 없어야 할 것 아닌가? 3대 세습을 비판한 것 자체가 김정은 체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직접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한다는 것은 자기 말에 대한 식언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칭 진보주의자라는 많은 사람들도 북의 인권을 문제 삼아 북한체제를 비판해왔을 뿐 아니라 북한의 3대 세습을 문제 삼아 김정은 체제를 인정 못하겠다고 아우성쳐 왔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우리사회의 주류무대에서 사라져간다는 것은 80년 5월의 광주항쟁에 버금가는 그 무엇이 일어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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