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해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지울 수 없는 추억이 있네. 

어릴 적 우리 아버지는 장난감 사줄 돈이 없어 장난감 대신 내 입에 피리꼭지를 물리곤 하셨는데, 벌써 그 세월이 50여년이 되었네 그려. 중학교에 입학할 때 아버님 손에 이끌려 피리 한 가락 불고 합격했네. 그 한가락 분다는 것이 요즘으로 치면 프로들이 부르는 무당가락인 창부타령을 불었던 것이지. 어린이답게 교과서에 있는 착한 가락을 불어야 되는데 어른들이 돈 벌 때 부는 돈 가락을 불었던 게야. 하기야 아버님한테 배운 게 그것 밖에 없으니까. 교장선생님께서 “그 가락 어디가락이냐?” 하고 물으시기에 “옆에 계신 아버님 가락입니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네.

그렇게 해서 중앙대 음악과를 졸업한 후 모교인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현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네. 그 학교는 내가 예술의 꿈을 키웠던 곳이기에 남다른 애착이 있었네. 교직생활 3년째 되던 해 2학년 담임을 부여 받았을 때였네. 우리 반 반장인 장무석 학생이 1학년 학생이 담배피우는 것을 보고 훈계한다고 학생의 엉덩이를 몇 차례 때렸는데 문제가 커졌단 말일세.

담임으로서 제가 가르치지 못한 죄가 크다며 정중히 사과하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장무석 학생은 무기정학을 당하고 말았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피해 학생이 몇 대 독자에다가 학부모가 교장에게 집요하게 협박성 징계요구를 하였다고 하네. 학생으로서 무기정학은 치명적이고 더군다나 모범생인 무석이 입장에선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죄보다 벌을 크게 주면 안 되지.  

점심시간에 무기정학이 공고 되었는데 몇 학생이 급히 ‘선생님 무석이가 가방 들고 교정 밖으로 뛰쳐나갔어요’ 하기에 먹고 있던 음식 그릇을 교무실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젓가락을 책상에 꽂고 학교를 나왔지. 교정 밖을 나오니 무석이가 학교 담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하염없이 울더란 말일세. 자네라면 그 심정이 어떻겠는가. 어린 마음에 세상이 더럽고 야속하고 비겁하다고 여겨지지 않겠는가. 내가 무석이 어깨를 잡고 “임마! 무석아 너 혼자 가면 되냐? 담임이랑 같이 가자”하며 그놈 붙들고 한없이 울었네. 그리고 그길로 모교 교직생활 때려 치웠네 그려.

다음날 새벽 출근하라며 나를 깨운 어머님께서 싸주신 뜨끈한 도시락, 그 맛있는 어머님 도시락이 어찌나 무겁고 야속하던지. 도시락을 들고 갈 곳이 없어 남산 안중근 동상 앞으로 갔지. 긴 의자에 누워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따듯한 어머니 도시락을 베고 하늘을 보니 10월말 찬 기운에 새벽 마지막 별이 지더란 말일세. 그 별이 김광복의 인생 같기도 하고...

그 후로 8년이 지난 가을, 반가운 편지를 받았네 그려. 당시 2학년 1반 학생들이 내게 편지를 보내온 것이네. 편지에는 “그때 선생님이 사라지셔서 매우 섭섭했는데 이제야 선생님 뜻을 알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퇴계로 음식점에서 2학년 1반 학생들 다 모이기로 했으니 꼭 참석해주십시오”라고 적혀 있더군. 우리 자식들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고 담임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이었기에 약속 장소로 달려갔지.

그런데 음식점에 들어서려는데 현수막에 “선생님 종례해주세요” 라는 글을 보는 순간 앞이 캄캄하고, 숨이 멎으며 복받쳤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말았다네. 담임이 종례도 안하고 점심 때 별안간 증발해 버렸으니 얼마나 내가 미웠겠는가. 십 여 년이 넘는 동안 종례 못해준 큰 죄인인데, 이제 와서 종례해 달라니 자네 같으면 기분이 어떠하겠는가. 어른이 된 그 많은 애들이 술 한 잔씩 따르며 하는 절을 하고 나서 출석을 불러 주라며 출석부를 건네더군. 당시의 시커멓고 두꺼운 출석부 있지. 말 안 듣는다고 패고, 지각한다고, 등록금 늦게 낸다고 대가리 패던 공포의 출석부. 한 학기가 지나면 너덜너덜해지던 슬픈 출석부. 바로 그것을 애들이 만들어와 출석을 불러 달라는 거야. 당시 학생이 48명이었는데 그 날 33명이 출석했지.  

“1번 김명숙”! 부르면 “네!”하며 소리 내어 울고, “2번 김명자!”하면 또 복받쳐 울고, 학교를 원망하며 보따리 싸 나간 녀석 “45번 장무석!”하니 “장가 갔어요”라고 대답하니 모두 “와!”하고 폭발적으로 웃더란 말이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의 안부와 지난 이야기로 울다 웃다 하면서 분위기가 넘쳐 나니, 무석이가 “선생님 이제 그만 울고 다 같이 노래방 가시게요”하며 내 손을 이끌더란 말이지. “먼저들 가 있거라. 곧 가마”하며 조금 시간이 지난 후 그냥 택시 타고 서초동 버스터미널로 가서 광주고속버스를 탔네. 사실 나도 예술인으로서 풍류를 아는 사람 아닌가. 같이 노래도 하고 얼싸 안고 춤도 추고 싶지만 그대들에게 나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또 팽개치고 말았네.

허!허! 그러고 보니 김광복이 또 종례를 못해줬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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