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당 앞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홍매화 향기와 함께 잔인하다는 사월을 보냈다. 그리고 공대 쪽문 쪽 눈이 부시게 푸르른 이팝나무 꽃들을 주우며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을 또다시 맞이한다. 모처럼 오후 일정이 없어 간단히 점심을 들고 한가로이 용지 주위를 걷다 문득 궁금해졌다. 사월이면 아직까지 버티고 남은 살얼음도 봄 햇살이 살포시 걷어내고 그 아래 쌓인 먼지들은 봄바람이 살랑 털어내고 봄비들이 정갈히 닦아낸다. 그 대지위에 새 생명이 움터 올라 저렇듯 아름다운 푸르름이 짙어 온다. 그런데 잔인하다니? 우리 학생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우리 7080세대들에게 잔인한 사월은 이해되나 계절의 여왕 오월은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생체기가 있다. 학창시절 괴짜 국사선생이 즐겨 낭송하던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들을 때도 왜 사월이 잔인한 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4.19 학생운동이 있던 해 나는 어렸고 아무것도 몰랐다. 대학 들어와 '전환시대의 논리'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을 읽고 난후에야 비로써 왜 사람들이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 아름다운 오월도 우리에겐 잊어서는 안 될, 결코 잊혀져서도 안 될 계절이다. 특히 '80년 광주' 그해 오월을 경험한 이들에겐 더욱 그렇다. 자기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참혹한 폭력과 살상에 맞서, 정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빼앗긴 선배, 동료들에 대한 부채의식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 숭고했던 민주를 향한 광주정신은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이다. X세대, Y세대라 불리우는 지금의 학생들은 80년 광주의 오월을 어떻게 이해하고 느끼고 있는지? 4.19세대에게 우리가 배웠듯이 우리도 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누군가 리영희, 강만길 선생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건 우리의 의무다. 자연이 베푸는 오월은 이렇듯 아름다운데, 우리가 느끼는 지금의 오월은 가슴 한켠이 먹먹해 오는 그런 안타까움의 계절이다. 

오월이 오면 꼭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김종률. 그는 1980년 초 경영대 학생이었다. 그가 주도하던 '사랑의교실'이란 야학에서 우린 처음 만났다. 당시 대학생들이 하던 대부분의 야학이 노동운동 중심의 이념야학이었던데 비해, 우리의 야학은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인근 공단의 근로자들을 위한 순수야학이었다. 당시 그는 정말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영랑과 강진'이란 자작곡으로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받기도 했다. 나는 이곡이 대학가요제 사상 가장 서정적이고 탐미적인 노래였다고 생각한다. 야학이 끝나고 늦은 밤 사직공원근처 대포집에서 그가 통키타를 퉁기며 부르던 '타향살이'는 정말 일품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순수한 열정으로 사회 문제를 고민했고 소박한 낭만을 즐길 줄 아는 청춘이었다. 

 '80년 광주' 그 해 오월은 우리 모두를 바꿔 놓았다. 일년 뒤 남도예술회관 김종률 자작곡 발표회에서 들었던 '검은 리본'이란 노래가 지금도 생각난다. 슬픈 단조풍으로 서정성은 쑥 빠지고 문제의식만 남은 곡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해 그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하였다. 광주항쟁 마지막 날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져간 윤상원, 이 땅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박기순 두 동문의 영혼결혼식때 합창되었고 지금까지도 민중의 아픔과 함께하는 노래이다. 이 불멸의 국민 민중가요를 우리 전남대 학생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30년이 지난 지금의 후배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며 뜨거운 가슴으로 불러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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