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일은 제122주년 세계노동절(May-day)이었다. 한때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메이데이를 불법화하고, 그 대신 3월 10일을 근로자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지난한 투쟁을 통해 1994년에 이르러서야 지금과 같은 노동절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굴종과 근면의 의미를 내포한 ‘근로자의 날’이라는 명칭은 아직 그대로이다.

메이데이는 1886년 5월 1일 미국의 노동자들이 정부와 자본에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도록 요구하고 투쟁했던 총파업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1889년 7월 세계 20여개 나라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결성한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그날의 희생을 기리고,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기념일로 결정되었다.

이렇듯 메이데이는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근로의욕을 높이기 위해 유급으로 하루 쉬는 단순한 그런 날이 아니다. 메이데이는 매 시기 노동자에게 부과되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 노동자의 공통의 요구를 제기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단합을 과시하는 국제적인 기념일인 것이다.

한국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노동의 유연화가 급격히 심화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는 빠르게 증가하였고, 파견, 용역, 사내하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간접고용도 크게 확대되었다. 우리의 삶, 특히 청년들의 삶은 점점 더 불안정한 노동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고, 아무리 오늘을 열심히 살아도 안정된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조건에 처하게 되었다.

어떤 이는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성한 신조어)’라고 부르고 있다. 흔히 프레카리아트는 전통적인 노동자계급 조직인 노동조합에 속하지 않는 다양한 종류의 불안정한 노동자를 가리킨다.

오늘날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프레카리아트 즉, 기간제 일용직 파트타임 노동자, 실업자, 노숙자 등은 구조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자본과 기업이 헐값에 편하게 쓰고 버리는 그들은 이제 노동시장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프레카리아트의 출현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부족의 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문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메이데이 슬로건은 전형화된 노동자나 조직된 노동자만의 저항과 연대를 담아내기 보다는, 불안정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에 내몰려 있는 프레카리아트의 다양한 사회적 권리를 요구하는데 그 중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일이 노동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불명확한 노동형태, 집단지성과 협력적 소통에 의한 사회적 노동의 확대, 노동시간과 삶의 시간이 점점 더 통합되어가는 현실  등이 보여주는 21세기의 노동조건과 지형은 분명 19세기 그것과는 다르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여전히 인간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메이데이의 당당한 주체로서 수많은 프레카리아트의 행진과 선언을 더욱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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