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만난 한 친구가 있었다. 공부도 그리 잘하지 못했고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도 아닌, 쉬는 시간마다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곤 하는 그저 평범한 친구였다. 특별한 점이라면 그 친구는 무척 가난했었다는 것뿐 그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그리 큰 약점은 아니었다.

그 친구는 '왕따'였다. 그것도 속칭 '은따(은근히 따돌림)'였다. 학교에 한 명 정도는 있을 법한 아이였다. 이유는 '냄새가 지독해서'였다. 그렇다. 그 친구에게서는 저 먼 곳 시골의 향이 났다. 가축의 비료, 퇴비 냄새 같은, 코를 잡게 만드는 그런 지독한 냄새 말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냄새가 난다는 말과는 달리 그 친구는 유달리 깨끗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씻지 않는다거나 옷을 빨지 않는다거나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보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런 말이 학교 내에서 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결의 움직임은 없었다. 모르는 척 하는 걸까? 그 점이 무척 의아했다.

그러다 한 번은 직접 그 냄새를 맡아보고 싶어 그 친구 곁으로 간 적이 있었다. 사실 말만 들었지 직접 맡아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아뿔싸! 정말 한 달은 빨지 않은 것처럼 케케묵은 냄새가 났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소문들이 사실로 밝혀지자 그 친구는 '더럽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 이후부터는 다른 친구들이 그 친구를 놀려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사실이니까' 그 친구를 보호할 필요도, 대변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 나는 그 친구의 속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한 사건이 발생했다. 짓궂은 친구가 그 친구의 냄새를 맡고 나서 기절하는 시늉을 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직접적으로 그 친구 앞에서 놀린 적이 없던 터라 우리들은 그 친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친구는 울음을 터뜨리며 가방도 챙기지 않고 바로 교실을 뛰쳐나가버렸다. 우리들은 당황해서 멍하니 학교를 빠르게 빠져나가는 그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친구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니? 그 친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그런 행동을 했니?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 일을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도와드리고 오는 효자 중에 효자인데 말이야….”

그랬다. 그 친구는 집안사정이 좋지 않아 시골의 할머니와 살면서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수업 시간 외에는 계속 일을 도와드렸던 것이다. 게다가 변변찮은 작업복 없이 교복을 입고 일하다 보니 냄새가 배었던 것이고, 그런 자신을 친구들이 싫어할까봐 제대로 말도 걸지도 못했다고 했다. 또 배인 냄새를 조금이라도 없애기 위해 매일같이 깨끗이 씻고 교복을 빨았다고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때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맞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속사정을 모른 채 색안경을 끼고 그 친구의 따뜻한 마음, 배려심 등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무척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보이는 것, 비춰지는 것이 전부일까. 그 이면에 담긴 의미는 생각지 않는 것일까. 문득 생각해본다. 우리들도 어느 순간 눈앞에 펼쳐진 사실들에 집착하고 맹신하면서 선의의 피해자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은 아닐까?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손을 내미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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