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미라 씨를 처음 본건 1월 11일 우리 대학에서 최초로 아프리카에 교환학생을 떠나는 박 씨를 인터뷰하는 자리였다. 그의 옆에는 우리 대학에서 생활하는 아프리카 교환학생 조셉 마르코 씨도 있었다.

박 씨의 첫인상은 굉장히 활기차 보였고 첫 인터뷰에 떨려하고 있었다. 막상 인터뷰가 시작 되고나니 박 씨의 얼굴은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떠나는 두려움보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아프리카로 떠나는 것이 무섭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도 그는 “내가 직접 탄자니아의 문화를 경험해보고 돌아와 ‘탄자니아는 위험한 나라’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다”며 당차게 말했었다.

그를 보며 기자는 아직도 부족한 내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같이 인터뷰를 갔던 기자와 우리도 외국어 공부를 하자고, 교환학생에 도전해보자며 박 씨의 열정을 부러워했다.

그랬던 그를 이제는 볼 수 없게 됐다. 박 씨가 탄자니아에서 한국어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오던 중 지난달 10일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박 씨의 사망소식은 우리 대학의 학생이기에 충격적이었던 것이 아니었다. 박 씨가 떠나기전 탄자니아 생활에 대한 설렘과 자신이 하고자하는 일에 대한 열정을 보았기에 그의 죽음이 더 안타까웠다.

인터뷰를 하던 그 날 기자가 찍은 박 씨의 미소를 담은 사진이 지난달 20일 진행된 박 씨의 추모식장의 영정사진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영정사진으로밖에 만날 수 없는 고인의 모습을 보며 기자 또한 박 씨와의 기억을 추억했다.

활짝 필수 있던 꽃이 졌다. 안타까운 죽음으로 추모식 현장은 눈물바다였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열정 가득했던 박 씨를 이제는 슬픔보다 웃음으로 보내려한다. 인터뷰 하던 그날의 박 씨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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