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우연치 않은 기회로 청각장애를 갖고 계신 작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들리지 않는 다는 아픔을 딛고 그림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작가 인터뷰 기사를 작성하던 중, 우리는 ‘말이 어눌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장애에 대한 표현이 적당치 않은 것 같아 조언을 구하던 중, 작가에게 예상치 못한 답변을 받았다. “어눌하다는 표현을 완벽하지 않다고 바꿔주실 수 있나요? 제 나름대로 노력해서 이만큼 할 수 있게 된 거거든요. 왠지 그 말이 저 자신에게 아프게 다가오네요.”비판조의 기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에게는 아픔을 줄
우연히 넘긴 탁상달력 속에 탈무드의 명언이 적혀있었다. “인간은 입이 하나, 귀가 둘이 있다. 이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 더 하라는 뜻이다.” 다른 이의 말을 더 많이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이 명언. 눈길조차도 잠시 머물지 않았던 그 문구가 오늘 무적을 적으며 괜스레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듣다"라는 단어에는 Hearing(단순 듣기), Listening(의미를 생각하며 듣기), Auding(반응하며 듣기)과 같은 단계가 존재한다고 한다. 단순히 듣는 Hearing이나 의미를 생각하며 듣는 Listening에
신문의 지면은 한정되어 있다. 하나의 상품인 신문을 만들기 위해 보도국은 이 한정된 지면과 인력으로 하루하루의 사회 변화를 엮어 내야한다. 은 격주 발행이니 2주간의 대학 사회의 변화를 직시하고 있어야 한다.신문이 발행되면 다양한 관점에서, 예리한 평가를 받는다. 기사 논점, 내용, 레이아웃, 사진 등 모든 것이 평가의 대상이 된다.이러한 신문 제작 과정을 3년 동안 약 50회 정도 거치면서 나는 조금이나마 분노하는 방법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분노는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서 나오는 분노가 아니다. 내가 생
이번 총학생회 선거는 개표 가능한 투표율 50%에 한 참 못 미치는 투표율을 기록했다. 한 표를 행사한 학생으로서, 무효가 되어버린 많은 표들이, 어떠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많은 표들이 아쉽기만 하다. 선거 보이콧을 주장하며 ‘무투표’를 행사한 학생들도 그 나름대로의 정당성 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말이다.‘선거 무산’이 민주적인 내년 재선거의 발판이 되길 바라고 있지만, 마지막 연장선거일 당시 투표 독려를 호소하는 두 선본의 후보자들을 본 학생이라면 대부분이 나와 같은 안타까운 마음일 것이라 생각한다.호소하고 있는 후보자들이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는 다시 시작된 걸까.5년 만에 총학생회장 선거가 경선이라는 소식에, 유권자의 선택권이 늘어났다는 사실에 기대를 했다. 지난 3년간 내가 경험했던 11월의 단일후보 출마 선거는 형식적이었으며 조용했다. 연장투표를 진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지루와 권태를 참지 못했던 걸까? 올해는 이례적으로 세 선본에서 후보자를 냈다. 보도국에도 비상이 걸렸다. 단선을 예상했지만 기자들의 예상을 빗나갔다. 왜 경선인지, 원인부터 분석해야 했고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지면에 담을 것인지 고민했다. 물론 신도 났다. 항상
대학신문에서 보통 소속 대학을 지칭할 때 ‘우리 대학(학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유는 대학신문 자체가 학교에 소속된 기관으로, 우리 일을 보도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라는 용어가 소속 대학을 지칭할 때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라는 말은 꽤 친숙하다. ‘우리 집’, ‘우리사회’, ‘우리나라’ 등. 농업사회였던 한반도는 ‘개인’보다는 ‘남’, ‘공동체’, ‘민족’, ‘규범’을 중심으로 발달됐기 때문에 ‘우리’라는 말이 친숙할 수밖에 없다. 오늘 날, 우리라고 지칭하는 것들은 어떤 모습일까?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시흥캠
올해 열렸던 용봉대동풀이 만큼 초청가수에 대한 학생들의 이야기가 많았던 적이 없었다. 한 커뮤니티에서는 ‘불독이라는 가수를 알아낸 학생회가 존경스럽습니다’라고 자조 섞인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유행어를 본 따 ‘꼭 조대 축제를 갔어야만 했냐!’는 플랜카드도 걸렸다. 2000년대 들어서 연예인 위주로 변해버린 대학축제의 모습에 비판의 목소리도 들려오고는 있지만 대학 축제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은 연예인에 있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나보다. 연예인 라인업이 약하다는 의견은 축제 예산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학생회비 납부율이 해마다 줄
영화나 드라마에서 밤잠 줄여가며 취재하는 기자의 모습은 언제나 그렇듯 Good Reporter로 그려진다. 막상 학생기자가 돼보니 떠나지 않는 물음표가 하나 있다. 진짜 Good Reporter에 대한 물음이다. 안수찬 편집장은 “기자가 몰입한 만큼 독자는 공감한다”고 했다. 학생들의 궁금함은 무엇인지, 불편함은 무엇인지, 즐거움은 무엇인지, 공감해야 한다. 한 선배는 정의롭지 못한 일에 분노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면을 통해 충분히 분노해야 할 사안에 제대로 분노하지 못했다면 비난의 화살은 피하기 어렵다. 영화 ‘스
17세기 철학자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본주의 시장의 수요, 공급, 가격을 결정하는 자동조절기능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때, 더 능력 있는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갈 때, 이로운 사회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자본주의는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지구 모든 나라가 빈곤을 벗어난 것을 아니지만 말 그대로 ‘살’만해졌다. 대학의 풍경도 여차 달라졌다. 애덤 스미스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오늘 날 수요가 없는 학과와 대학은 줄이고 없애는 결정은 ‘보이지 않는 손’에 따를 결과
나는 지방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여대생이다. 내가 ‘지여인’가 된 때는 3년 전, 전남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다. 대학생이 되면 전공서적을 자랑스럽게 끼고 다니며, 철학을 이야기하고 맘만 먹으면 영화나 연극 따위를 보며 감상에 젖는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기대했다. 어렸을 적부터 청춘 시트콤을 보면 자라온 세대 누구나 이런 로망이 있을 것이다. 즐거움만 있을 줄 알았던 나의 20대의 여름은 취업과 스펙고민으로 더욱 무덥다. 얼마 전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 역시 나와 같은 지방대 학생이다. 그 친구는 곧 서울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 대학은 80년대 ‘민주화’를 이끌어 온 대표적인 대학이다. 5·18민주화운동의 시발지가 우리 대학이었으며 ‘민주화’를 외쳤던 교수님과 동문들의 터전이었다. ‘교육지표사건’을 이끌었던 11명의 교수들. 5·18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윤상원 열사와 박관현 열사. 그리고 박승희 열사까지. 이곳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발전에 있어 상징적인 곳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떳떳히 ‘민주화의 성지’라고 외칠 수 있을까.얼마 전 부산대학교는 교육부에 의해 총장직선제 승인을 받았다. 대학 사회에서는 깜짝 놀란 눈치이다. 부산대학교는 이제 대학구성원들
학생 기자생활을 하다보면 취재를 위해 전화를 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전화가 올 때가 있다. 전화를 받을 때면 두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기사에 대한 감사의 전화라면 뿌듯함을 느끼고 기사에 대한 일종의 ‘부탁’이면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끊게 된다.여수캠퍼스 생활관에서는 ‘자치회비’라는 것을 걷고 있다. 학기별로 걷는다. 그런데 이번 학기에 기존 10,000원에서 15,000원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관생들이 느끼는 복지의 혜택에는 변화가 없었고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됐다. 여론이 형성되자마자 자치회비의 액수 문제뿐만 아니라 관생들 사이에서
지난 달 28일, 이틀 간 진행된 세월호 2차 청문회가 이틀 간 진행됐다. 2차 청문회에서는 세월호의 침몰 원인과 사고 당시 선원들의 조치, 불법 증개축 등 기계적 문제와 민관유착 관계를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춰졌다.2차 청문회의 결과, 세월호 운항 관리의 부실의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한 해경 실무자들은 청해진해운 측으로부터 수차례 접대를 받으며 민관유착이 심각한 상태였다고 지적하기도 했다.세월호 참사 하루 전, 세월호의 '쌍둥이 배'로 알려진 ‘오하마나호’에 과적이 지시됐음에도 불구하고 선장이 거부하고
단선으로 치러진 여수캠퍼스 문화사회과학대 선거가 무효 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이다. 이유는 무효표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란다. 무효표가 많이 나온 이유는 학생들이 투표를 하는 과정에서 투표도구인 ‘도장사용’에 있어 혼란이 가중됐기 때문이다. 즉 투표소 안에 인주가 있어 잉크가 내재된 도장이라 생각을 못하고 뚜껑이 닫힌 상태서 인주를 찍어 표시를 했다는 것이다. 또한 도장뚜껑을 열어서 투표를 한 학생의 경우라도 잉크가 희미하게 찍혀 다시 한 번 인주를 찍어 표시한 것이다.더 충격적인 것은 총 선거 과정을 책임지고 관리해야 하는 중앙선관리위
다시 시작이다.2016년 드디어 새로운 학기가 시작됐고, 하나 더 높은 학년으로 진급했다. 16학번 신입생들은 대학에 첫 발을 내딛은 해일 것이다. 이들도 새로운 사회에서 삶을 새로 써 나가는 준비 중일 것이다. 허나 마냥 즐거워하기에는 우리들의 삶은 모순덩어리다.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기르는 대학 어딘 가에서는 불참비를 걷고, 군대식 기합을 주고 있다. 새로운 삶을 꿈꾸는 후배들, 그들의 더 나은 대학생활 위해 한 일이라고는 난 글 몇 줄밖에 쓴 것이 없다.새로운 삶을 생각하고자 하니 또 떠오르는 것이 있다. 아마도 2년 전
올해로 내가 에 온지 3년째가 되었다. 내가 지나온 지난 2년 동안 만났던 수많은 취재원들과 기자들과의 회의, 내 이름이 붙은 기사를 통해 무엇을 전하려 했는가. 전달을 기록한 나의 펜이 학생들의 위해 사용되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았던 화살이 되기도 하였을까. 그렇다면 내가 전하려던 것은 혹 내가 전해야 하는 것은 학생들이 알아야 하는 정보인가. 학생들이 겪은 부조리한 사회인가. 단순 나의 글 자랑인가. 더 나은 삶을 위한 움직임인가. 누군가에게 기쁨과 희망이 되는 것인가. 또 그렇다면 기자라는 자는 어떤 인
폭력. 남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에 쓰는, 주먹이나 발 또는 몽둥이 따위의 수단이나 힘. 넓은 뜻으로는 무기로 억누르는 힘을 이르기도 한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맞으면 당연히 아프다. 그런데 맞아도 아픈 줄 모르는 경우도 많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맞는 것에 익숙해지고 저항하지 않다보면 맷집이 생긴다. 폭력에 내성이 생기는 것이다. 무기의 종류는 다양하다. 역사였다가 돈이 됐다가 가선점이 되기도 한다. 점점 우리를 휘두르는 무엇인가에 맞는 것에 익숙해져간다.폭력의 끝은 파멸이다. 우리는 이 익숙함
“안녕하십니까.”신문 배포를 위해 예술대 건물에 들어가면 낯선 학생들에게 깍듯한 인사를 받곤 했다. 예술대 신입생들이 인사를 잘 한다는 것, 기강잡기가 강하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이달 초 음악학과의 한 학생이 ‘군기 문화’의 피해사례를 알리면서 논란이 확대됐다. 음악학과 학생회는 ‘사과’했다고 했고, 본부는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며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보이고 있다.이 와중에 ‘MT, OT를 금지한다는 공고를 해 학생들의 자치권을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 명의 피해학생이라도 보호해야한다’는 고민에
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대답만 하면 돼.정부 하는 짓이 딱 ‘답정너’ 짓이다. 고구마 100개 먹은 듯 답답함이 밀려온다. ‘논리’따위는 필요 없다. 정해진 답, 정부의 가치관에 맞는 퍼즐을 끼워 넣기만 하면 된다. 되는대로 막 가져다 끼우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조각들이 대부분이다. 정부의 지나친 확신에서 ‘파시즘’의 냄새가 난다.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가 풍기던 네오나치 냄새와는 급이 다른 구린내다.‘먹고사니즘’은 명백한 문제인 것을 눈감고 지나치는 것에 대한 꽤나 튼튼한 자기방패역할을 해왔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
N포세대. 더 이상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을 세는 것도 지쳤나보다. 언론은 우리를 ‘N포세대’라 부른다. 이번 신문에는 ‘포기’라는 단어가 수차례 나온다. ‘포기’는 지금 ‘헬조선, 지옥불반도’에 살고 있는 20대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무엇을 더 던져버리고 또 무엇을 버릴 것인가.던질 포 抛. 젊음을 던진다. 취업을 위해, 정규직이 되기 위해. 연애세포도 던진다. 웹드라마 ‘연애세포’에서 사람들은 연애가 필요 없다고 생각해 세포를 추출해서 은행에 맡긴다. 신선한 설정이다. 우리는 연애세포를 추출할 수도 없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