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는 “인문대 1호관”이다. 인문대 1호관은 조형미가 뛰어난 신고전주의적 건축물로 용봉캠퍼스에 우뚝 솟아 대학 캠퍼스로서 위용을 자랑하는 상징적 건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개교 초창기인 1954년 11월 13일 최상채 총장과 학생들이 현 인문대 1호관 자리에 모여 성대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이 기공식은 문학부 합동강의실(현재의 인문대 1호관)·법과대학·공과대학·중앙도서관·대학본부·대강당·식물원·종합운동장을 건설하겠다는 종합 건설 기공식이었다.기공식이 거행된 후 1년 만인 1955년 12월 25일 문학부 합동강
전남대를 대표하는 상징물은 무엇인가? 질문을 받는다면 대부분의 용봉인들은 용봉탑을 떠올린다. 정문에서 관현로길을 따라 걷다보면 용봉관 앞 회전교차로에 우아한 자태의 용봉탑이 보인다. 이 용봉탑은 누가 언제 만들었을까? 1976년 11월 9일, 호국단 간부들이 민준식 총장(8,9대 총장)에게 용봉탑 건립을 건의했다고 전해진다. 1952년에 문을 연 전남대가 개교 24년이 지났지만 학교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없으니, 용봉인의 애교심과 기상을 고취시키고 학풍을 조성하기 위한 상징물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용봉탑 건립
대학의 수준과 미래를 측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대학의 도서관에 가보는 것이다. 도서관 장서 보유량이 어느 정도인지, 지식을 갈망하는 학생들의 에너지가 얼마나 가득 차 있는지 그 분위기를 직접 느껴보라는 것이다. 2020년 5월, 전남대 캠퍼스는 연말 완공 예정인 디지털도서관 건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 대학은 ‘홍도’ 라 불리는 도서관 본관, ‘백도’로 불리는 도서관 별관, 지금 공사 중인 디지털도서관까지 3개의 도서관이 있는걸 보니, 꽤 괜찮은 대학인 것은 분명하다.개교 초창기인 1955년 말, 용봉동 캠퍼스에는 금호각
전남대 개교 초창기에는 캠퍼스 안에 ‘용주마을’이 있었다. 정문 좌측에 위치한 용주마을(용봉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함)은 건물 121동에 대지 1,343평으로, 총 49세대가 살고 있었다. 마을이 학교 안에 있으므로 대학발전은 물론 교육환경 저해요인으로 많은 문제점이 야기되었다. 캠퍼스를 완벽하게 조성하기 위해 마을 매수는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그 당시에는 교육 기반시설인 강의실이나 실험실이 너무나 부족했다. 모든 예산이 교육 기본 시설인 강의실이나 실험실 건축에 우선 배정되다 보니, 마을 철거를 위한 예산 확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
캠퍼스에 꽃이 활짝 피었다. 학교에 사람이 가장 많이 돌아다닐 시기인데도 카페나 공원 등 사람들이 모일 공간은 예년에 비해 스산하다. 사람들은 깔끔한 유리문 안쪽 에이포 용지로 붙여진 텍스트 뒤에 전등이 켜있나 꺼져있나 확인하는 것이 다반사다. 이래저래 죄송하다는 그리고 미안하다는 내용이다. 죄송할 일도 미안할 일도 아니다.하지만 어딜 가나 꽃을 대신한 글씨가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요즘은 어디를 가도 사람들을 반기지 않는다. 그나마 사람을 반기는 데는 가게들일 것이다. 문을 닫은 가게도 드문드문 보인다. 코로나 19는 세계인의 일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단어 ‘소통’. 그래서인지 이 주제가 심도 있게 다뤄지는 게 때로는 물릴 때도 있다. 그저 마음 터놓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일상에서 골치 아픈 문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소통이란 끝없이 새로운 유형과 상황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할 만큼 만만치 않은 활동으로 보인다.소통을 위해 우선 타인과 관계 맺는 주체인 ‘나’를 먼저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감정과 가치관을 기반으로, 어떤 의도를 담아 타인에게 목소리를 전하는지 뚜렷이 인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
전남대학교 설립1951년 9월 14일 국무회의에서 국립 전남대학교 설립이 인가되자 제2대 전라남도지사 박철수를 중심으로 기성회를 조직하여 전남대학교 설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재원 마련과 도립 의과대학․농과대학․상과대학, 사립 대성대학의 통합 작업이 난항을 겪게 된다.1951년 12월, 제3대 전라남도지사로 새로 부임한 이을식은 유림의 향교재단과 도민이 소유한 도시제사주식회사의 주식들을 전남대설립기성회에 기부하도록 하였다. 이을식 지사는 도의회를 소집하여 도립인 의과대학과 목포상대, 농과대학을 국립으로 전환
이상한 시간들이 흐르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직장인들은 직장에 가지 않는다. 사람이 모이는 것들은 죄다 취소되었고, ‘격리’ ‘동선’ 등의 단어가 세상을 떠다닌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 밖에 나서기를 두려워한다거나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마스크를 끼지 않은 상대를 보고 눈살을 찌푸린다. 예민하고 긴장된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그 예민함과 긴장감은 일상을 괴롭힌다. 알게 모르게.2월에서 3월의 내 달력은 취소의 표시인 쫙 그어진 선들로 채워졌고, 3월과 4월의 달력은 헐렁헐렁하다. 4월은 거의 흰 도화지 같기도 하다. 날
박승희 열사는 1972년 4월 12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열사는 주변 사람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착하고 예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 뜻을 굽히지 않는 의로운 고집을 지닌 여학생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성당을 다니며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는 세심한 사람이었다. 1987년, 목포 정명여고에 입학한 박승희 열사는 YMCA 활동을 하면서 친구들과 사회문제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1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이란 노래의 가사입니다. 노래를 듣는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미쳐버린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런 건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야 하는데 묘하게도 오래 남았습니다. 생존을 걸고 싸우는 전쟁터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미쳐버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식으로.“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나치의 절멸수용소라는 극한의 공간에서도 아이의 웃음을 지켜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아버지에 대한 영화입니다. 누군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대학교 졸업을 앞둔 때가 떠올랐다. 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왜 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학부를 다니는 동안 ‘6하 원칙’처럼 내 진로의 첫머리를 고민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재수와 여러 번의 휴학에 ‘남들보다 늦어’란 스스로의 꼬리표를 달고 행선지도 없이 일단 떠야 하는 비행기 신세 같았다. ‘하고 싶은 거 다 해 보겠다’는 나름의 이유일지 핑계일지 혹은 회피일지 모르게 대학원에 진학했다.하지만 이번에는 조급함이 밀려왔다. 이십대의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내 젊음이 끝나간다는 두려움이었다. 응당 요즘의 20대
전남대 정문에서 법대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박관현열사 혁명정신계승비”가 보인다. 박관현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으며, 민주화운동에 앞장 선 자랑스러운 우리들의 선배다.1953년 영광에서 출생한 박관현은 군 제대 이후 1978년 전남대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한다. 당시 법대 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던 나이든 대학생이었던 그도 법대진학이 곧 고시준비라는 일반적인 법대생의 등식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신독재와 열악한 민중 생존권 현장이 그를 도서관이나 고시원에 붙들어 놓지 않
‘새치기 하지마세요’, ‘다리 좀 오므려주세요’, ‘좀 조용히 하세요’ 하루에 수 십 번도 하는 말이다. 물론 ‘속’으로. 학교로 향하는 버스 안 옆 자리 아저씨가 과도하게 다리를 벌려 불편했다. ‘다리 좀 오므리라고 아저씨 혼자 타고 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못했다. 그때마다 나는 참거나, 자리를 옮기곤 했다.한번은 버스에 타기 위해 한 줄로 서있던 적이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버스에 타려 하니 어린 학생이 바로 내 앞에서 새치기를 했다. 그때도 ‘새치기 그만하라고 새치기해서 먼저 타면 기분 좋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못했다. 이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맑고 향기롭게’ 시민 운동에 평생을 헌신하신 법정스님. 스님이 한때 전남대 학생으로 공부했던 우리 대학 동문임을 아는 이는 많치 않다. 학적부에는 박재철이란 속명으로 상과대학 경제학부(1953∼1955) 재학중 1955년 12월 22일 제적 처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법정스님(1932년생, 본명 박재철)은 해남 우수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목포에 있는 불교종립학교인 정광중학교에 입학했다. 정광중에서 1948년 목포상업학교로 전학을 하고 1950년 학제 개편에 따라 1951년 2년 과정의 ‘목
요즘 신문방송학 전공 ‘저널리즘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으며 좋은 기사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부쩍 늘었다. 그런 와중에 전대 신문 기사의 비평을 맡게 되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전대 신문 2019.9.23일자 서창현 기자의 이라는 기사에 대한 비평을 조심스럽게 시작하고자 한다.좋은 기사에 대해 묻기 전, 먼저 ‘기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사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정보 전달’이라고 생각한다. 정보전달이라니, 굉장히 무미건조하고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냥 기사
대학교수, 소설가, 사회운동가로서 삶을 살아온 송기숙 교수를 한 단어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당한 말이 있을까? 지식인의 사전적 정의는 “지식계급에 속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다.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며 사회에 참여하여 잘못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송기숙 교수는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수식어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송기숙 교수의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사건은 1978년 6월 일어난 ?우리의 교육지표선언?이다. 해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있다. 유신의 종말인 1979년을 향해 달려
사랑을 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있다. 설렘, 질투, 행복, 슬픔, 괴로움 등이 그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랑을 할 때 인간이 느끼게 되는 감정은 비슷한가보다. 제인 에어가 1847년에 출간됐음에도 제인 에어가 로체스터에게 느끼는 감정들은 요즘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사랑에 빠졌음을 감지했음에도 애써 아니라고 부정하는 모습, 그와의 대화가 즐겁지만 일각에서는 잘해주면 떠나버릴까 걱정하는 모습까지.소설은 제인 에어의 성장과정을 차근차근히 보여준다. 고아로서 박해 당하던 어린 시절, 자선학교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는 모습, 더
1978년 6월 27일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는 를 공동 발표한다. 이 사건은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학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더욱 강화되는 시기에 참담하기만 한 교육현장에서 지각 있는 교수들이 떨쳐 일어나 학원의 민주화, 인간화, 그리고 조국의 자주·평화·통일을 위해 헌신적으로 실천 투쟁할 것을 밝힌 것이다.에 서명한 11명의 교수들은 우리 시대 실천하는 지식인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며, 그중에서도 영어영문과 명노근 교수는 부인 안성례 여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을 위해 헌신한 광주의 대표적 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떨어져 가지 말자...(중략)...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고” 민중투쟁이나 촛불집회에서 자주 듣는 아주 익숙한 노랫말이다. 이 노랫말을 쓴 사람은 바로 우리 대학 출신인 김남주 시인이다.시인 김남주는 1945년 전남 해남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입시 위주의 획일적인 교육에 반발하여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했고, 1969년 검정고시로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